항목 ID | GC6000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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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齊民 |
영어공식명칭 | Song Jemin |
이칭/별칭 | 해광(海狂),이인(以仁),사역(士役),제민(濟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미선 |
출생 시기/일시 | 1549년 - 송제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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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송제민 김천일 막하에서 활약 |
몰년 시기/일시 | 1602년 2월 27일 - 송제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08년 - 송제민 운암사(雲巖祠)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88년 - 송제민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933년 - 송제민 재실(齋室) 영모재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 송제민 운암서원 복설 |
출생지 | 대곡리 - 전라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
거주|이주지 | 광주 황계(黃溪) -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
묘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송제민(宋齊民)[1549~1602]의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이인(以仁), 사역(士役), 호는 해광(海狂), 초명은 제민(濟民)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송구(宋駒)이며, 아버지는 교서관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이다.
[활동 사항]
송제민은 1549년(명종 4) 전라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전라도 광주 황계(黃溪)[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로 옮겨와 살았다. 문강공(文康公)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호남에서 은둔하며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양산룡(梁山龍)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김천일(金千鎰)을 주장(主將)으로 추대하고,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수원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하였으며, 군마와 군량을 제공하였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송제민이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좌의병장으로 추대하여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아래쪽의 적을 막고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병장으로 추대하여 금산 위쪽의 적을 맡아 막도록 하였다. 이후 송제민은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의 군대가 패배하자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들이 해산하기 전에 다시 모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흩어져 모을 수 없었고, 조헌 역시 패몰(敗沒)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7) 표제(表弟) 김덕령(金德齡)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복을 벗고 거의(擧義)하도록 독려하여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제주도로 가서 말을 구해 주었다. 정유재란 때는 남원성에 들어가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만나 방어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는데, 송제민의 머리가 대머리인 탓에 왜인의 첩자로 의심을 받아 붙잡혔으나 마침 감찰 민순(閔恂)이 남원성에 왔다가 송제민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원에게 청하여 풀려났다. 송제민은 양원에게 지금의 지형은 방어에 좋지 않다며 진을 옮기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양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패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왜인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치고 재궁(梓宮)을 불태우자 비분을 이기지 못하고 와신기(臥薪記)를 지었다. 와신기는 병가(兵家)에 관한 것과 췌적(揣敵)의 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세상에 내놓지는 않았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 화친(和親)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임금의 구언(求言)에 따라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복수의 뜻을 피력하고 화의를 강하게 배척하고자 했는데, 관찰사의 만류로 올리지 못하고 그 길로 물러나 해산(海山)에 은거하며 자제(子弟)들을 가르치다 1602년(선조 35) 2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은 송제민에 대해 "수월(水月)의 대절(大節)이다" 라고 극찬하였고, 문열공(文烈公) 조헌은 "천하의 선비"라고 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묘갈(墓碣)을 지어 주었다.
[저술 및 작품]
송제민은 『해광유고』를 저술하였고, 1783년(정조 7) 송제민의 5대손인 송익중이 『해광유고』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해광집(海狂集)』을 편집·간행하였다.
[묘소]
송제민의 묘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08년(숙종 34) 전라도 광주 유림들이 송제민이 살았던 운암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운암동] 아래에 운암사(雲巖祠)라는 서원을 세우고 송제민을 배향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운암사가 철거되었고, 1933년 송제민의 재실(齋室) 영모재를 건립하였다. 1998년 영모재가 있는 곳에 현재의 운암서원을 복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