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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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周鼎 |
영어공식명칭 | Kim Jujeong |
이칭/별칭 | 문숙(文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려 후기 광주 지역에서 해양부전첨으로 활동하고 동남도병마사, 지첨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주정(金周鼎)[1228~1290]의 본관은 광산(光山)[해양군(海陽郡)]이며, 광산김씨 문숙공파의 파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주영(金朱永)[혹은 김위(金位)], 할아버지는 김광서(金匡瑞)[혹은 김광세(金光世)], 아버지는 김경량(金鏡亮), 형은 김수(金須)이고, 아들은 김심(金深)이다. 부인은 장씨이며, 장인은 장득구(張得球)이다.
[활동 사항]
김주정은 1257년(고종 44) 음서(蔭敍)로 부성현위(富城縣尉)가 되었고, 몽골군의 침략 당시에는 순문사(巡問使) 한취(韓就)가 천거하여 권지도병마녹사(權知都兵馬錄事)가 되었다. 1264년(원종 5) 5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그 뒤 해양부전첨(海陽府典籤)에 임명되고, 또 김준(金俊)의 추천에 의해 내시(內侍)직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1) 대부경 좌사의대부(大府卿左司議大夫)에 임명되어, 이듬해 안렴사(按廉使)·수령들의 근무 태도와 공물·부역이 고르지 않은 것과 향리가 세력을 믿고 부역을 피하는 등의 폐단을 조사하는 일을 건의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로서 수행해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유수군(王京留守軍)·합포진수군(合浦鎭守軍) 및 황주·봉주(鳳州)·염주(鹽州)·백주(白州) 둔전군의 뒷받침이 번거로워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무고를 입어 유배된 사실 등을 원나라에 밝힌 공으로 귀국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해 재추회의(宰樞會議)에서 따로 필도치[必都赤]를 두어 중요한 국사를 담당하도록 건의하였으며, 또 내료(內僚)의 계사(啓事)를 금지하고 신문색(申聞色)이 대신하도록 주장하였다.
1280년(충렬왕 6)에는 소용대장군 관군만호(昭勇大將軍管軍萬戶)[혹은 소용대장군 우부도통(昭勇大將軍 右副都統)]이 되고, 금호부(金虎符)와 인신(印信)을 받았다. 1281년에 김방경과 같이 합포에서 일본 정벌에 나섰다가 태풍을 만났을 때 많은 군사를 구출해내는 공을 세웠다. 1283년(충렬왕 9)에 김주정은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어 매와 사냥개로 왕의 환심을 얻었다. 1284년(충렬왕 10)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또는 진변만호(鎭邊萬戶)]가 되면서 남도의 해변을 순력하였다. 이 무렵 수선사(修禪社)에 있던 충지(冲止)는 5월 하순에 절박한 당시 사정을 시로 지어서 김주정에게 보낸 적이 있다. 1287년(충렬왕 13)에 궁중 연회에서 무례한 행동을 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좌천되었고 1290년(충렬왕 15)에 사망하였다.
한편 김주정의 생애 기간과 차이가 있지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진군(茂珍郡)조에 따르면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동정 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고을의 성황신(城隍神)에 제사 지냈는데, 다니며 이름을 부르면 신령한 일이 나타났으므로 두루 조정에 함께 보고하여 작(爵)을 봉(封)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