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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60
한자 忠臣父子柳順汀-柳泓墓域-祕話
영어의미역 The Secret story of Loyal Subjects' Graves
이칭/별칭 충신 부자 류순정·류홍 묘역의 비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유덕인

[개설]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43-31~32번지 진주유씨(晉州柳氏) 묘역에 위치한 유순정(柳順汀)[1459~1512]·유홍(柳泓)[1483~1551] 묘역은 16세기 전반에 조성된 구로구 유일의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이다. 명필 송인(宋寅)이 비문을 쓴 신도비 등 묘역 내 석물들이 독특하면서도 정교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 수법을 보여 주고 있어, 당대의 묘제 및 조각사 등 16세기 초 공신 묘역 조성 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서예사와 복식사 연구 등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유순정·유홍 부자 묘역은 2004년 8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진주유씨 문성공파종회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유순정·유홍, 그들은 누구인가?]

유순정은 1459년(세조 5) 영의정을 지낸 유양(柳壤)과 집현전부수찬을 지낸 정즙(鄭楫)의 딸 청주정씨(淸州鄭氏)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지옹(智翁)이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과 함께 연산군의 혼정을 종식시키고 국란으로부터 사직을 구해 낸 3공신(三功臣)의 한 사람이다. 이후 유순정은 3정승(三政丞)을 역임하며 나라를 바로 세웠고, 삼포왜란 등이 일어났을 때는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킨, 명실상부 문무를 완전하게 갖춘 인물로서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유순정은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장성해서는 문장(文章)이 그 기국(器局)처럼 광대하였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재주와 생각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젊은 시절부터 의연(毅然)한 풍채와 침중(沈重)한 품격, 그리고 너그러운 도량과 호방한 문장으로 이미 대신(大臣)의 재목으로 주목 받았다. 주장이 공평하고 순수하며, 기쁨과 노여움을 표현하지 않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는 기풍을 지녔다.

그러나 유순정이 무엇보다 다른 문신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은 문무를 완전하게 갖춘 탁월한 능력이었다. 학문과 병법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무예 실력도 출중하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이 발군이어서 100근이 넘는 강궁을 쏘아 맞추는 활솜씨는 다른 장수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근신(勤愼)하여 그런 재주가 없는 것처럼 처신하였다.

1482년(성종 13) 유순정은 별좌 권효충의 딸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은 유홍이며, 형조판서를 역임한 유영(柳濚)과 좌의정을 역임한 유부(柳溥)는 친조카이다. 유홍은 어려서 무예를 익혔으며, 중종반정 당시 유순정을 따라 반정군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정주목사, 충청도병마사, 경상우도병마사, 전라도수군절도사, 북병사 등 변경의 장수 직을 두루 역임하고 말년에는 훈련원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신으로서 무략이 출중한 명재상으로 우뚝 서다]

유순정은 22세가 되던 1480년(성종 11) 형 유첨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즈음 유순정의 무재(武才)를 눈여겨 본 사람이 선전관으로 천거하겠다고 나섰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29세가 되던 1487년(성종 18) 별시 알성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그러나 다른 문신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탁월한 무재로 인해 유순정은 함경도평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무반 직인 변장(邊將)에 임명되었다. 함경도평사 시절 야인들의 침범을 막지 못해 한때 의주로 유배된 적은 있으나, 사복시주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왔으며, 뒤이어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491년(성종 22)에 북방이 소란스러워지자 성종은 방어 대책 수립과 함께 적임자를 물색, 추천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의영고(義盈庫)의 수장을 거쳐 평안도평사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는 종묘령(宗廟令)을 거쳐 사간원헌납에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을 혼정으로 이끈 주역인 임사홍(任士洪)의 간악함을 논박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하는가 하면, 북방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형조참판겸예문관대제학과 공조참판을 지내고, 이어서 평안도관찰사, 지중추부사,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겸도총관으로 승진하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구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에 의하면, 유순정은 문신임에도 변방이 소란하거나 계책이 필요할 때면 우선순위로 추천을 받았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약 22회) 변방 전략에 큰 공을 세워 정승 반열에 오른 인물인 고려 후기의 최영(崔瑩)과 조선 전기 세종 조의 김종서(金宗瑞)·신숙주(申叔舟), 성종 조의 허종(許琮)·성준(成俊) 이후 단연 뛰어난 문신 장수(將帥)였던 것이다.

그렇듯 문신뿐만 아니라 무신의 역할까지 수행해서 항상 변방에서 활동했던 유순정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던 상황이 일어났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올린 것이 발단이 되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대학살이 벌어졌다. 김일손은 평안도평사로 부임하는 유순정을 송(宋)나라 한기(韓崎)와 범중엄(范仲淹)에 비유하는 시를 지어 전송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하여 김종직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김일손이 “유순정김종직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하며 유순정김종직의 제자 중 중요 인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일손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유순정에게 화가 미치지 못했던 것은 당시 멀리 외직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무재가 돋보여 본인의 뜻과는 달리 자주 외직을 돌게 되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결국 유순정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한 셈이 된 것이다.

무오사화의 화를 면한 뒤 유순정은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유순정의 뛰어난 활 솜씨가 그의 앞날에 또 한 번 서광을 비추어 주었다. 연산군이 활터에 행차하는 자리에서 호종 문신들과 활솜씨를 겨루게 하였는데, 유순정이 3발 중 2발을 명중시켰던 것이다. 이에 연산군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전 관서 지방에서의 공을 거론하며 품계를 올려 홍문관부응교에 임명하였다. 이후 유순정연산군의 신임이 두터워 임사홍의 후임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오위도총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위대한 업적]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초기에는 성종 때의 옛 신하들이 많이 남아 있어 정령(政令)이 문란하지 않았다. 그러나 1498년의 무오사화 이후 점차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감히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이 없었다. 연산군은 직언하는 신하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으며, 1502년(연산군 8)에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폭압 정치로 나라를 혼란 상태로 빠뜨렸다.

연산군의 혼정이 계속되자, 유순정박원종·성희안 등과 함께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거사하는 날 유순정은 아들 유홍과 조카 유영을 데리고 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혁명군을 진두지휘하면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당시 유순정은 대비(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진성대군을 직접 시위(侍衛)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아 즉위케 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처음 박원종이 반정을 주모할 당시 성희안과 상의하기를 “이조판서 유순정이 덕망과 지략이 있어 거사를 함께할 수 있는 인물이니 반드시 참여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박원종과 같은 무용(武勇)을 가진 장수도 성공을 자신하지 못하여 반드시 유순정을 거사에 참여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때 만약 “유순정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반정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종반정 후 유순정은 조정 귀인 중에 제거, 숙청되어야 할 많은 인물들을 넓은 도량으로 구명해 주었고,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조정에 중용토록 하였다. 특히 변방의 군사를 튼튼히 하고 새 왕업을 받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국가 부흥의 운세를 열게 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

유순정은 반정이 성공한 뒤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녹훈되어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숭정대부가 되었다. 세상에서는 유순정박원종, 성희안을 일컬어 세칭 삼대장(三大將)이라 불렀다. 중종이 등극한 뒤 유순정은 가장 먼저 연산군이 폐지했던 경연(經筵)을 부활하였는데, 이를 위해 직접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하였다. 그 후 대광보국숭록대부우의정에 승진, 병조판서를 겸하고 1509년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1510년 삼포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지휘,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출정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당시 조선은 왜인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라, 유순정은 왜란을 진압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방책을 각 포마다 실시케 한 뒤 돌아왔다. 유순정이 돌아오자 중종은 좌우 부승지를 마중 보내 유순정의 노고를 대신 위로하며 치하하였다. 유순정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각별하여 재산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삼포왜란 당시 군공을 들어 1512년(중종 7) 10월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유순정은 그로부터 2개월 뒤 12월 20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4세였다.

[묘역을 지켜 낸 홍섬(洪暹)]

경륜을 펴 보일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중종과 많은 사람들이 크게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였다. 유순정의 죽음에 중종은 매우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내어 줌과 동시에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온수동, 부천시 여월동·작동에 이르는 9,917,355㎡(약 300만 평)의 땅을 내려주었다.[본래 이 지역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수탐리로, 1896년 경기도 부평군 수탐면으로 바뀌고, 1914년 다시 경기도 부천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963년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고, 1980년 다시 구로구에 편입되었다.]

다음해 중종은 정조회례연(正朝會禮宴)을 정지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장례를 성문 밖까지 전송하여 유순정의 죽음을 영광스런 슬픔으로 애도하였다. 이후 시호는 처음에는 무안(武安)이었다가 문정(文定)으로 개시(改諡)되었고, 위패(位牌)는 중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순정의 묘역은 중요한 유적으로 매우 크고 웅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대에 묘역은 점차 규모가 축소되었고, 심지어 현재는 아파트 건립으로 인해 묘역 북쪽과 동쪽이 잘려 나가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왜 유순정의 묘는 이렇게 초라하게 변해 버렸을까?

유순정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남인 출신이었다. 남인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서인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 말부터 정치 보복이 가해지고 붕당의 공존성이 파괴되면서 남인들이 축출되기 시작하였다. 남인 측 사람이었던 장희빈을 두둔한 축이 바로 남인 출신들이었기에 탄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인들이 서울의 주류 사회에서 축출되기 시작한 숙종 말부터 대략 20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은 극심한 차별을 당했다. 집권당인 노론의 탄압으로 인해서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에는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남인의 근거지는 경상북도 안동이 되었고, 200여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 내어야만 했다. 유순정의 후손들 역시 힘이 없던 남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묘소를 돌보지 못했다.

그나마 묘소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은 홍섬(洪暹) 덕분이었다. 홍섬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이다. 영의정을 역임한 홍언필(洪彦弼)의 아들이요, 영의정 송질(宋軼)의 외손자로서, 홍섬의 둘째 부인이 유순정의 아들 유홍의 큰딸이었다. 홍섬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 1528년(중종 23)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중종 26)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된 후, 1535년(중종 30)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 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어 대사헌에 올랐으며, 1571년(선조 4)에 좌의정, 1573년(선조 6) 나이 70세로 영의정이 되어 선조로부터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 받고 동시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하는 영광을 입었다. 그 후 6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영의정을 중임하였다. 이렇듯 홍섬이 세 번 연속 영의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면서 유순정의 묘를 돌볼 수 있었다.

[유순정·유홍 묘역 현황]

1513년 3월 28일 조성된 유순정의 묘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산43-32번지 일대로, 지하철 1호선 온수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지하철 7호선 천왕역에서 서북쪽으로 약 800m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유순정과 그 부인 안동권씨의 묘는 동보아파트 102동 서쪽 오류동 산 중턱에 단을 달리하여 상하로 자리하고 있는데, 두 묘의 좌향(坐向)은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정남향이다.

유순정·유홍 부자 묘역은 후대에 들어와 매각 등으로 점차 규모가 축소되었고, 20여 년 전 동부제강 사원 아파트인 동보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유순정의 묘역 북쪽과 동쪽이 잘려 나가 현재 남아 있는 총 면적은 26,531㎡뿐이다. 묘역의 왼쪽으로는 유한대학과 성공회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강수목원아파트가 자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경인로가 위치하고 있다. 또 오류역 남쪽 광장에서 마을버스 07번이 묘소 앞길까지 다니고 있으나 묘소 입구가 좁고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어려움이 많다.

이렇듯 그 동안 유순정·유홍 묘역 일대에 대한 정비나 보수 등이 없어 훼손이 심했으나 2004년 8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면서 일대 26,531㎡가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서울특별시 문화재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이의 관리 기능을 다하려는 진주유씨 문중의 합치된 결의로 묘역을 정비함과 동시에 영정 등을 봉안할 수 있는 영정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재실(齋室)이 오래되고 낡아 더 이상 재실 역할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종친들의 단합된 합의로 재실을 건립하게 될 것이다.

유순정 신도비는 묘역의 단 아래 동쪽으로 동보아파트에 바로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유순정의 분묘 봉분 북쪽으로는 사성(莎城)이 조성되어 분묘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나 용미(龍尾)가 조성되어 있지는 않다. 사성은 원래 지금처럼 분묘가 가까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으나, 20여 년 전 주변에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하방으로 이동되었고, 분묘도 우측으로 약간 옮겨져 하방 이동되었으며, 봉분 역시 다시 조성되었다고 한다.

유순정 신도비는 1513년(중종 8) 아들 유홍진천군(晉川君) 강혼(康渾)에게 비문을 청해 받았으나 비는 세우지 못하다가 그 손자 유준(柳浚)이 비석을 마련하여 1567년(명종 22)에 세웠는데, 중종의 부마로서 당대 해서체로 이름을 날린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다.

유홍의 묘는 유순정의 묘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오류동 산43-3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유홍의 묘가 자리한 동쪽 아래로는 다른 곳에서 옮겨 온 후손의 묘 5기가 자리하고 있다. 유홍의 묘역 역시 유순정 묘역과 마찬가지로 봉분 위로는 사성이 조성되었고, 별도의 용미는 조성되어 있지 않다. 봉분 주위로는 후손들이 호석을 조성하였지만, 봉분의 잔디가 쓸려 나가는 등 봉분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다. 유홍 신도비는 손자 유준이 1573년(선조 6)에 세웠는데, 현재 묘역 동쪽 후손 묘 아래쪽으로 아들 유사필의 묘갈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유순정의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농대 가첨석 형태로서 홍섬이 비문을 짓고 송인이 글씨를 썼다.

[조상의 숨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진주유씨 종손가의 노력들]

중종반정 공신인 유순정·유홍 부자묘역과 석물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데 이어 「유홍 영정」이 2004년 10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되자 진주유씨 문성공파종회에서는 그동안 소유, 관리하고 있던 유순정의 영정을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진주유씨 종친회에서는 수백 년 동안 종가 대대로 철저한 비밀 속에 고이 간직해 오던 유순정·유홍 영정을 앞으로도 무탈하게 영구히 보존할 방도를 모색하던 중 국가 기관에 의뢰하여 보관하는 것이 현 시대에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2003년 1월 9일 경기도 역사박물관에 위탁 보관하였다. 그리고 안전한 보존을 위해서도 문화재로 지정받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게 되면 관리의 어려움도 없을 뿐만 아니라, 훼손이나 손실 및 망실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하여 종친회 이름으로 서울특별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순정 초상」은 16세기 초기의 초상화로서 조선 전기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회화사적으로 가치가 커서 2007년 3월 22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유씨 종가에서는 1506년 중종의 명에 따라 입각도형(入閣圖形)으로 그려진 유순정의 전신상 영정 등 4점과 유홍의 전신상 영정 1점 등 총 5점의 영정을 500여 년 동안 고이 간직해 왔다. 특히 유순정의 영정은 갑오경장 이후 36년간의 일제강점기 동안 왜인들의 문화재 수탈 등 온갖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일체 굴하지 않고 지켜 왔다. 그 중 6·25전쟁 때 목숨을 걸고 조상의 영정을 지켰던 진주유씨 종가 종손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피난을 가게 될 상황에 처하자 현 진주유씨 종손인 유원배의 증조할아버지 유종식(柳宗植)은 식솔과 가재도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조상의 영정함만을 달랑 어깨에 걸쳐 멨다고 한다. 이에 유종식의 부인이 “아무리 조상의 영정도 중하지만,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는데 처자식은 안중에도 없이 조상의 영정만을 걸러 메고 피난길에 오르는가?” 하고 서운함을 표하였다. 그러자 유종식은, “종가의 종손으로서는 조상님의 영정을 훼손하거나 잃어버리면 그것은 조상님을 잃어버리거나 욕되게 하는 것과 같아서 죽어서도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지 않는가?”라고 호통을 쳤고, 결국 영정과 함께 각종 고서들과 가솔들을 챙겨 무사히 피난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 문화재로 인정받은 유순정·유홍 묘역은 문화재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관리가 부실하고 규모 또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 사당, 영정각, 신도비각, 유물전시관, 재실 등 후속 사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은 진주유씨 가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구석진 곳에 사장되었던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 주고 보존하여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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