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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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영어음역 | Seow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우인수 |
[정의]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조선시대 이후 선현제향(先賢祭享)과 교육을 위해 설립된 기관.
[개설]
우리나라에서 서원의 시작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면서부터이다.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 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 양성과 교화 정책에 깊이 연관됨으로 인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 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여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전국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서원이 있었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서원 폐단의 격화로 인한 강력한 단속으로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영조 대에 서원 철폐론이 제기될 당시 서원·사우 등 여러 명칭을 모두 헤아린 숫자가 1,0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의 남설은 그 질적인 저하를 수반하고 사회적인 폐단을 야기하였다. 제향 자격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봉사 대상으로 선정되고 점차 그 성격이 제향 일변도로 되면서 마침내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하였고, 그에 반비례하여 강학 활동은 위축되었다. 이것이 후에 서원 철폐의 명분이 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하에 국가 체제의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68년과 1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원(一人 一院) 이외의 모든 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소의 사원만 남겨놓게 되었다.
서원 철폐 때 남은 47개의 서원은, 현재 북한에 소재하여 근황을 알 수 없는 11개소와 6·25전쟁으로 소실된 채 방치되어 있는 강원도 김화의 충렬서원과 철원의 포충사 2개소를 제외한 34개소가 존속하고 있다. 이들도 물론 광복 뒤의 토지 개혁으로 위토를 상실하여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전쟁의 피해로 건물이 일부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지만 제향 인물의 후손이나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중건 또는 신축하여 옛날의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주로 문중이 중심이 되어 서원을 개축 혹은 신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서원은 대개 후손이 건립과 운영을 담당하고 있어 본래의 서원 기능은 거의 없다. 다만 후손들에 의하여 춘추의 제향을 지내거나, 조상 유적지 순례소로 활용되어 족적 결합의 공고화나 대외적인 가문 위세 과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현황]
구미 지역에는 경락서원, 매강서원, 송산서원, 오산서원, 옥계서원, 현암서원, 월암서원, 금오서원, 낙봉서원, 동락서원 등 많은 서원이 있었다. 이 중에서 사액을 받은 서원은 금오서원(金烏書院), 낙봉서원(洛峰書院), 동락서원(東洛書院)이었다.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금오서원은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선산의 유학자 최응룡과 김취문이 중심이 되어 선산부사 송기충에게 건립을 건의하였고, 선산부사가 경상감사를 거쳐 조정에 알려 마침내 재가를 받아 1570년(선조 3)에 금오산 밑에 건립하게 되었다. 이어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10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지금의 금오서원이 소재한 선산읍 원리의 남산 밑에 옮겨 복원하였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모두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낙봉서원은 1646년(인조 24)에 건립되어 김숙자(金叔滋), 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을 배향하고 있다.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후 1933년에는 강당을, 1943년에는 외삼문을, 1977년에는 사당을, 1989년에는 동재를, 19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지었다. 낙봉서원은 1989년 5월 29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동락서원은 인조 때 산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5년(효종 6)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장현광이 지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자리에 세웠고, 1676년(숙종 2)에 동락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동락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이며, 이 서원에는 장현광의 유물인 가죽신, 삿갓, 우산대, 지팡이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 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32년에 사당을 중건하였고, 1933년에 장경우(張慶遇)를 종향하였다. 197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공단에서 인동으로 연결되는 구미대교 끝 부분 좌측 아래의 낙동강 기슭 야산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