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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184
한자 沈澮
영어음역 Sim Hoe
이칭/별칭 청성군(靑城君),청보(淸甫),공숙(恭肅),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공신
성별
생년 1418년연표보기
몰년 1493년연표보기
본관 청송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지역에서 성장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청보(淸甫).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심용(沈龍)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심덕부(沈德符), 아버지는 영의정 심온(沈溫), 어머니는 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세종소헌왕후(昭憲王后)가 누나이다.

[활동사항]

심회의 아버지 심온태종 때 왕명을 받고 중국에 사은사(謝恩使)로 갔을 때 좌의정 박서(朴壻)가 “명나라에 간 심온태종을 비난하는 사건에 관련되어 장차 왕위를 노리고 있다”라고 모함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소헌왕후는 압록강까지 몰래 사람을 보내어 부친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심온은 “일편단심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을 뿐 조금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라고 하고 돌아오다가, 마침내 압록강에서 체포되어 장단(長湍)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유모는 세 살에 불과한 아기였던 심회를 등에 업혀 정처 없이 피신하다가 어느 날 선산 망장(網障, 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에 이르러 해가 저물고 몸도 지쳐 삼밭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작정을 하였다. 이때 망장 마을에 살고 있던 주부(主簿) 강거민(康居敏)이 부인과 똑같이 앞들 삼밭에서 용이 하늘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상히 여겨 초롱불을 들고 삼밭에 가보니 과연 보잘것없는 한 노파가 옥동자를 안고 있었다. 아들이 없는 강노인 내외는 심회를 집에 데리고 와 친자식처럼 키웠다.

심회가 15세 때 1433년(세종 15) 부친의 결백이 밝혀졌고, 문종이 즉위한 뒤 심회는 음직으로 돈녕부주부에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1454년(단종 2) 첨지중추원사·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1457년(세조 3) 지중추원사·공조판서를 지냈다. 1458년 중추원부사·판한성부사를 거쳐, 1459년 안주선위사를 겸하고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61년 영중추원사·형조판서를 거쳐, 146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1466년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이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봉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 원상(院相,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였다. 1473년 진충협보(盡忠夾輔,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함)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다.

1472년(성종 3) 강거민의 부음을 듣고 그 상에 복하였으며, 또 강거민의 처상에는 영의정을 사퇴하고 하향하여 거류암(居留岩)에서 심상으로 삼년 여묘를 마쳤다. 이 일을 인연으로 지금도 청송심씨(靑松沈氏) 종중과 신천강씨(信川康氏) 문중이 서로 혼사도 않고 형제간 같이 우의 있게 지내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매년 음력 10월 17일 청송심씨 종중과 심천강씨 문중이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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