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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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造山祠 |
영어음역 | Josansa |
영어의미역 | Josan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 7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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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976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 72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유창, 유한량, 길사순(吉師舜)을 기리는 사당.
[개설]
유창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개국공신이다. 강릉유씨(江陵劉氏)의 시조로, 자는 맹의(孟義), 호는 선암(仙庵)이고, 강릉부 우계현(羽溪縣)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군사(知郡事) 천봉(天鳳)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었고, 전공좌랑(典工佐郎), 예의정랑(禮儀正郎)을 거쳐, 호조의랑(戶曹議郎), 성균좨주를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를 지내다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다. 1401년(태종 1)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예문관대제학,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408년(태종 8)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간 능을 지켰다.
1410년(태종 10)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태종 13)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었고, 1416년(태종 16)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 3) 궤장(几杖)을 상으로 받았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유창은 왕씨를 보호하여 벼슬을 내리고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정몽주의 후손에게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길사순의 자는 익우(翊虞), 호는 송운(松雲)이고,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아들이다. 유창의 고제(高弟)로 아버지의 명을 따라 관직에 나가 선공직장(繕工直長)에서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에 올라 충성을 다하였다. 유한량은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의사(義士)로 자는 충겸(忠謙), 호는 은재(隱齋)이며, 본관은 강릉으로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선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무장현감(茂長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진주성에서 왜적과 교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위치]
조산사는 조산마을에서 북쪽 길로 올라가다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를 넘어가면 바로 산 아래에 하두치라고 불리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1797년(정조 21)에 정산사(鼎山祠)를 창건할 때에 유창(劉敞), 유한량(劉漢良)을 조서(曺庶)와 함께 연벽으로 향사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00년(고종 37)에 단을 세웠고, 1976년에 복설되었는데, 이때 조산사(造山祠)를 건립하여 유창과 유한량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길사순(吉師舜)을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강당과 내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향사일은 음력 3월 1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