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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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素姬 |
영어음역 | Gim Sohui |
이칭/별칭 | 만정(晩汀),순옥(順玉)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5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판소리 명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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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김소희길 33] |
성별 | 여 |
생년 | 1917년 1월 14일 |
몰년 | 1995년 4월 17일 |
대표경력 |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호는 만정(晩汀)이며, 본명은 순옥(順玉)이다. 1917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김소희길 33]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소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광주로 시집간 언니 집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때 광주에 내려온 이화중선(李花仲仙) 일행의 공연을 보게 된 뒤 소리에 이끌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협률사 공연을 보러 다녔고, 결국 「심청가」의 눈대목[판소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거나 흥미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추월만정」을 그럴 듯하게 흉내 낼 정도로 소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 언니는 나무랐으나 형부가 독려해 주면서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입문시켰다. 이후 김소희는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단가(短歌)를 6개월 정도 배우면서 애기 명창이란 이름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송만갑이 시골로 떠난 후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소개로 창극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1932년 서울로 올라온 지 한 달여 만에 한성주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이후 전계문(全桂文)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에는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丁貞烈)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朴東實)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鄭應珉)·김여란(金如蘭)·정권진(鄭權鎭)·김연수(金演洙)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이렇게 내로라하는 명창들로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으면서 김소희는 박유전(朴裕全)-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박동실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한 흐름과, 박유전-정재근(鄭在根)-정응민으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또 다른 흐름, 그리고 송흥록(宋興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흐름까지 꿰뚫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김소희는 또한 ‘사통팔달한 예인’이었는데, 이는 그가 소리뿐 아니라 전통 예술 전반에 걸쳐 두루 능했기 때문이다. 춤은 14~15세 때 전라북도 정읍에서 손창식에게 배우다가 끝을 못 내고 말았으나, 나중에 전주에서 정성린(鄭成麟)에게 승무(僧舞)를 제대로 배웠다. 또한 사설을 공부하기 위하여 신조열·윤석호와 같은 한문학자에게 한문을 배웠고, 또 이들이 판소리 사설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하면 하나하나 적어 두었다고 한다. 붓글씨는 이때 공부했다.
춤에 관한 김소희의 재능은 그의 발림에서 엿볼 수 있는데, 소리판에서 그만큼 적재적소에 부채를 펼치고 접는 소리꾼은 아마 드물었을 것이다. 부채를 무대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멋지게 그려냈고, 또 춤으로 다져진 기예의 덕으로 판소리를 부르면서 이리저리 무대를 왔다 갔다 하는 자태 또한 빼어났다. 이는 그가 춤에 일가견이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붓글씨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에 걸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입선할 정도로 거의 프로 수준에 도달했고, 가곡이나 시조도 무대에 올라 부를 만큼 출중했다. 그의 판소리의 성음이 유독 미려(美麗)한 것은 이런 가곡 발성의 영향도 있다고 평가된다.
김소희는 뛰어난 성음과 재능에 힘입어, 16세부터 스승들과 나란히 레코드를 취입했다. 레코드 취입을 위해 정정렬·한성준(韓成俊)·오태석(吳太石) 등과 일본에 가기도 했다. 19세 때는 빅타레코드의 전속 소리꾼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창극 활동 및 라디오 방송 출연도 자주 했으며, 1936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동백(李東伯)의 판소리 은퇴 공연 무대에 올랐고, 1939년에는 만주 하얼빈까지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다. 1940년경에는 화랑창극단의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이도령 역의 박후성(朴厚性)과 함께 청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8년 김소희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해 이사가 되고,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 국극인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다. 「햇님 달님」은 공연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여 가며 어렵게 만든 무대였는데, 막을 올리자마다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 「햇님 달님」은 우리 공연계에 여성 국극의 전성기를 가져오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국악예술고등학교 재단이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 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상훈과 추모]
1931년 남원춘향제 민속예술경연에서 1등상을 받았고, 1959년 국악진흥회에서 주는 제4회 국악상을 받았다. 1962년 세계방송대상, 196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 입선, 196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 신인예술상, 1971년 유네스코에서 주는 제2회 아시아 음악제 방송 적합성 부문 우수상, 1972년 문화공보부가 주는 문화예술진흥 공로상,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국창기념비 건립헌수, 1982년 초대 한국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7년 남원시 예술문화대상, 1991년 서울시 문화상·초대 동리대상, 1992년 춘향문화대상, 1994년 제1회 방영일 국악상을 받았다. 1995년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4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사망 후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