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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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浚 |
영어음역 | O Jun |
이칭/별칭 | 감천(感泉)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기화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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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
성별 | 남 |
생년 | 1444년 |
몰년 | 1494년 |
본관 | 동복 |
대표관직 | 통선랑 |
[정의]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동복(同福). 호는 감천(感泉). 한림원승지를 역임한 오자귀(吳自貴)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오팽년(吳彭年)이다.
[활동사항]
오준(吳浚)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예절을 숭상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28세 때인 1471년(성종 2)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4일을 연명케 하였다. 그 후 부친이 등창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입으로 며칠 동안 종기의 농혈을 빨아서 병이 나았다. 그러나 얼마 후 합병 증세로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자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예단하고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먹이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그 해 4월 1일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꼭 두 달 만에 아버지까지 죽게 된 것이다.
이에 오준은 취령산 아래 양지 바른 명당 터에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묘 아래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소금과 간장을 입에 대지 않는지라 온몸의 털이 하얗게 변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집에서 따라온 개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함께 뒹굴며 오준을 지켜 주었다는 것이다. 삭망(朔望) 때면 호랑이가 날쌔게 산짐승을 물어 와 제수(祭需)로 받쳐 주기도 하였다.
또한 근처에 샘물이 없어 오준이 매일 새벽 두어 마장 거리에 있는 뺌산[秀山]에서 물을 길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요동치더니 여막 아래에 샘물이 솟구쳐 생수가 넘쳐났다. 하늘이 감동하여 천지조화로 거두어 낸 맑은 감천수(感泉水)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고을 수령이 달려와 샘의 둘레를 정자(井字)식 석축으로 개수하였다. 오준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 준 샘이라고 하여 이름을 효감천(孝感泉)이라 짓고 샘가에 표석 비를 세워 주었다. 이후 이 샘에서 운이(雲伊)라는 여인이 불결한 속옷을 빨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오준이 잠을 자고 있는데 개처럼 거느리던 호랑이가 꿈에 나타나서는, 양고살재 넘어 백암마을 함정에 빠져서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오준은 상복 차림 그대로 20리나 되는 험한 고갯길을 넘어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가 꿈속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이 창칼로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죽이려고 하였다. 오준은 다급하게 “범을 해치지 말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당신이 임자면 저 함정에 들어가 보라.”고 다그치자 오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랑이가 잡혀 있는 함정으로 들어갔고, 호랑이는 주인을 만난 개처럼 반가워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흥덕현감이 감사와 어사에게 알려서 왕에게 장계(狀啓)를 올렸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94년(성종 25) 조정에서 오준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정려(旌閭)를 내리고, 뒤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임명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하였으나 벼슬은 주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통선랑(通善郞)을 증직하였다. 또한 성종 말에 유림들이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봉안했는데, 1748년(영조 24) 진사 백시명(白時明) 등이 상언하여 창효사(彰孝祠)로 현판을 바꾸고 법지리로 이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원래의 위치인 신림면 외화리에 다시 지은 뒤 오준을 주벽으로 모시고 향사(享祠)하고 있다.
영조 때에도 그의 효행의 행적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 이천보(李天輔)와 김재로(金在魯), 정유양(鄭有良), 조명현(趙命顯) 등이 효감천의 명문을 지어 탄미(歎美)하였다. 또한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묘비명을 짓고, 호남 실학의 거두 황윤석(黃胤錫), 호남 석학 기정진(奇正鎭) 등이 『효감천실기(孝感泉實記)』 서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