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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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宮墀 |
이칭/별칭 | 여구(汝九)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기승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지역에 살았던 효자.
[개설]
도봉구 쌍문동(雙門洞)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효자 남궁지(南宮墀)와 그의 처 하동 정씨(河洞鄭氏),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남궁조(南宮鋽)까지 정문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계]
『함열 남궁씨 족보』에 따르면 남궁지는 승지공파(承旨公派) 22세손으로 자(字)는 여구(汝九)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한 남궁도(南宮燾)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며, 부인은 하동 정씨와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활동 사항]
남궁지는 가난한 형편에도 어려서부터 부모를 극진히 모셔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었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다.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는 꿩고기를 구하려 사방으로 노력했으나 구하지 못해 울부짖으며 돌아오던 도중 꿩 한 마리가 길옆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요리하여 어머니께 드리니 효력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무덤 옆에 움집을 짓고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했는데 매일 간절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아랫목에는 앉지 않고 부모님 생전에 곁에서 모시던 것처럼 행동했다.
[묘소]
남궁지는 사후, 쌍문리(雙門里) 남쪽 기슭에 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1967년 현재의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의 도락산에 있는 문중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양주에 살던 진사 이회종(李會鍾) 등이 남궁지 부부와 아들을 위한 정문(旌門)을 내려줄 것을 예조에 청원하자 예조에서 1893년(고종 30) 10월 입안(立案)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동부승지(同副承旨)였던 이석영(李石榮)이 그 내용을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이 정문을 내리고 남궁지에게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贈職)했다. 또한 정문을 지을 때 목재와 목수는 국가에서 지원할 것, 그리고 그 자손의 호세(戶稅)와 여러 잡역을 면제해 주라는 명도 함께 내렸다. 현재 정문은 1995년 11월 12일에 복원한 것으로,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있는 함열 남궁씨 승지공파 도봉 문중회 선산의 도락재(道樂齋) 재실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