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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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絅 |
이칭/별칭 | 일장(日章),용주(龍洲),주봉(柱峯),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52-1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혜원 |
출생 시기/일시 | 1586년 - 조경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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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조경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 |
몰년 시기/일시 | 1669년 - 조경 졸 |
부임|활동지 | 조경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사당|배향지 | 용연 서원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
사당|배향지 | 곡강 서원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 3리 |
사당|배향지 | 문암 서원 -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용산리 |
성격 | 관인|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한양(漢陽) |
대표 관직 | 형조판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목서흠 신도비 비문을 찬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조선의 개국공신을 두 명 배출한 집안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조수곤(趙壽崑)이고, 할아버지는 공조좌랑 조현(趙玹)이다. 아버지는 봉사 조익남(趙翼男)이며, 어머니는 좌승지에 추증된 유개(柳愷)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딸인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조경(趙絅)[1586~1669]에게 글을 배웠던 조카 조위명(趙威明)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활동 사항]
조경은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보지 않고 거창에 은거하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형조좌랑, 목천 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교리 등의 청직·요직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재능 있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논박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 척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음 해에 집의로서 청나라 공격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을 때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풀려 나온 후 회양 부사를 지냈다. 1658년(효종 9)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과 저술]
1643년(인조 21) 통신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 『일본 기행(日本紀行)』을 저술하였다. 저서로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東槎錄)』이 전한다. 또 여러 편의 묘갈문(墓碣文)과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대표적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의 목서흠 신도비(睦敍欽神道碑)에서 그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목서흠 신도비는 조경이 글을 짓고 그 조카인 명필 조위명이 글씨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포천의 용연 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 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 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