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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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周鎭 |
이칭/별칭 | 문보(文甫),탄옹(炭翁),충정(忠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692년 - 이주진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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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이주진 증광 문과 병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49년 - 이주진 졸 |
묘소|단소 | 이주진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이조 판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문보(文甫), 호는 탄옹(炭翁). 증조할아버지는 이갑(李搕)이고, 할아버지는 이광하(李光夏)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집(李㙫)이며, 어머니는 군수 김수빈(金壽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주진(李周鎭)[1692~1749]은 1714년(숙종 4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5년(영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 세자시강원 설서로 세자의 교육 방법을 아뢰었고, 이어 검열·지평·대교·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732년(영조 8) 경기 어사로 재임하면서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사간원 정언·헌납, 홍문관 교리·수찬 등 언관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경계의 글을 올렸다. 1736년(영조 12)에는 시독관(侍讀官), 검토관, 이조정랑,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영조 13) 공홍 감사(公洪監司)·대사간·승지를 지내고, 1738년(영조 14)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그의 성실함을 임금이 치하하였다. 1740년(영조 16) 이조참의를 지내던 중 임금이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는 그의 언의(言議)가 평완(平緩)하여 당시 영조가 추진하던 탕평책을 잘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1742년(영조 18) 호조참판·평안 감사 등을 역임하였고, 이후 예조참판을 지냈다. 예조참판 재임 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충렬(忠烈)을 널리 알리고, 임금에게 증직을 청하였다.
1744년(영조 20)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었고 이조·병조·예조·형조·공조의 판서 등을 지냈다. 이후 지중추부사로 내의원·봉상시(奉常寺)·선공감(繕工監)·선혜청·사역원(司譯院)·평시서(平市署)·사복시 등의 제조를 두루 역임하였다. 1745년(영조 21)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관리 적체를 해소할 것과 서얼을 허통할 것을 주장하였다. 1746년(영조 22) 경기도 관찰사로 나아갔으며, 1747년(영조 23)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임종(臨終)에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는 경계를 남기고 죽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덕수 이씨 묘역에 있다. 우이 계곡에서 방학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도로 왼쪽에 천주교 공원묘지가 있는데, 덕수 이씨 묘역은 공원묘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사람됨이 충후(忠厚)하고 주장하는 의논이 화평(和平)하여 임금이 그 때문에 믿고 맡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슬퍼하였고,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냄]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