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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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彦伯 |
이칭/별칭 | 국필(國弼),해장(海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무신.
[개설]
고언백(高彦伯)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강화도 교동(喬桐)의 향리(鄕吏)로서 무과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교동 지방에서 세거한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국필(國弼), 호는 해장(海藏)이다.
[활동 사항]
고언백은 박진(朴晋)·황진(黃進)·원호(元豪)와 함께 임진왜란 4대 명장(名將)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종군하며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을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압록강 주변 국경에서 변장(邊將)과 군관(軍官)으로 있으면서 조정에서 파견되는 사신을 호위하고 북경에 여덟 차례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군사가 평양을 포위하여 왜군이 몰래 달아나려고 하자, 조정에서 고언백에게 장사 400여 명을 뽑아 인솔하고 적군에 맞서도록 하였다. 이에 고언백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자 적의 무리 200여 명이 서로 쳐 죽이고 도망갔다. 선조가 의주로 피란할 때는 영원 군수로서 대동강 왕성탄 전투에서 왜군과 교전하였고, 양주에서 왜병 42명을 참살하였다. 7월 고언백이 양주에서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칠 것을 자청하자 그 달 24일 선조가 이전의 전공을 인정하여 특별히 당상관으로 올려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을 보호하라고 명하였다.
고언백은 진을 쳐서 싸우는 것보다 복병 전술에 더 능하였다. 양주에서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산꼭대기 험한 곳에 모여 있다가 수시로 나와 뒤떨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이에 적군이 대군을 풀어 수색하였으나 고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끝내 해치지 못하였다. 특히 항상 여러 능 뒤에 복병하였다가 적군을 쏘아 죽여서, 적군이 일찍이 태릉(泰陵)은 침범한 적이 있었으나 건원릉, 강릉 등 여러 능이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고언백은 양주에서 여러 번 큰 전투를 치렀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한 달 사이 세 번이나 승리하여 인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양주로 몰려왔다. 또한 조정에서도 “양주 백성들이 그를 의지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그곳 백성들의 마음을 사서 경성의 백성들이 모의해서 내응(內應)한 것은 다 고언백의 힘입니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왜적 600여 명이 토원(兎院) 지방의 가옥을 불태우자,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산기슭으로 도망치는 적의 수급 62급을 참획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노원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장 사명 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이끄는 승군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의 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밖에도 여러 공을 인정받아 선조에게 마장과 녹비를 하사 받았다. 고언백은 벽제관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를 거쳐, 명나라 군사들과 연합으로 한성 탈환 작전에 침투 부대를 지휘하여 공을 세우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경기도 방어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臨海君)이 제거될 때 그의 심복이라 하여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죽었다.
[상훈과 추모]
양주 지방의 능침을 잘 보호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