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55 |
---|---|
한자 | 太祖李成桂 |
이칭/별칭 | 중결(仲潔),송헌(松軒),이단(李旦),군진(君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의 천축사와 관련된 조선 전기의 왕.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李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흥 최씨(永興崔氏)이다. 목조(穆祖)로 추존된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남경(南京)[간도 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았으며,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과 덕원 지방에서 원나라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자춘 또한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천호로 있었으나,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하여 공을 세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성계 역시 담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1351년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 혼인하여 6남 2녀를 낳고,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성계는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박의(朴儀)를 죽이고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원나라, 여진족, 왜구와의 싸움에서 잇따라 전공을 세우며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1388년에는 최영(崔瑩)과 손을 잡고 이인임(李仁任) 일파를 제거,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당시 중국은 원명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서도 친원파와 친명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우왕과 친원파에 의해 요동 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던 이성계는 우군 도통사가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위화도까지 나아갔다가 회군을 단행,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 고려의 일인자가 되었다.
결국 1392년 7월 조선을 개창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사(王師)였던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건의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편으로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1394년 정도전(鄭道傳)이 기초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가 신덕 왕후 소생의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서 책봉하자, 이방원(李芳遠)이 1398년 이방석·이방번(李芳蕃)과 그들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을 살해하였다. 태조는 이에 왕위를 이방과(李芳果)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으니,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 1400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여 함흥 지방에 머무르며 태종이 보낸 차사(差使)를 모조리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였는데,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고도 한다. 불교에 심취한 것은 왕자의 난 이후 은퇴할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398년(태조 7) 태조는 도봉산에 있던 옥천암을 지나다가, 이전에 이곳에서 백일기도했던 것을 상기하고는 천축사(天竺寺)라 사액하였다고 한다. 옥천암은 673년(문무왕 13) 의상 대사가 의상대에서 수도를 할 때, 제자를 시켜 옥천암을 짓게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부근의 거찰 영국사의 부속 암자였다. 천축사가 본격적으로 중흥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의 사액 이후이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別殿)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東九陵) 내에 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 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 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 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곡장(曲墻)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변화를 보여 준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은 것이 특징인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봉분의 아래 부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그 외에 석호(石虎)·석양(石羊)·혼유석·고석(鼓石)·장명등·석마·문인석·무인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상훈과 추모]
태조 이성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