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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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周鎭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은선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692년 - 이주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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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749년 - 이주진 사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60년 - 이주진 묘표 건립 |
현 소재지 | 이주진 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5(N37° 39′ 50.2809″, E127° 01′ 10.1773″) |
성격 | 묘 |
양식 | 단분 합장묘 |
관련 인물 | 이주진(李周鎭)[1692~1749]|여흥 민씨(驪興閔氏) |
소유자 | 덕수 이씨 종중 |
관리자 | 덕수 이씨 종중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덕수 이씨 묘역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주진의 묘.
[개설]
이주진(李周鎭)[1692~1749]은 한성 판윤 이광하(李光夏)의 손자이자 좌의정 이집(李㙫)의 아들이다. 이조·병조·예조·형조·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위치]
이주진 묘(李周鎭墓)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5번지 덕수 이씨(德水李氏) 제2묘역에 위치하여 있다. 덕수 이씨 제2묘역은 우이 계곡에서 방학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도로 왼쪽에 있는 천주교 혜화동 교회 공원묘지 입구에 위치한다. 가장 상단에는 이합 묘(李柙墓), 그 아래는 이집 묘(李㙫墓)가 있고, 그 아래가 이주진 묘이다.
[변천]
이주진 묘는 18세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형태]
묘는 단분 합장으로 정경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합장되었다. 좌향은 동남향이다. 석물로는 묘표, 석상(石床), 향로석, 석망주, 문석인 등을 갖추었다. 원형 봉분에는 호석(護石)을 낮게 둘렀는데, 아버지 이집 묘의 형태를 계승한 것이다. 반면 이집 묘의 호석에는 명문이 없는 형태이었으나, 이주진의 호석 정면에는 ‘조선국 대총재 덕수 이공 주진 지묘 정경부인 여흥 민씨 부좌(朝鮮國大冢宰德水李公周鎭之墓 貞敬夫人驪興閔氏祔左)’라고 새겼다. 그리고 봉분 주변에는 사성(莎城)[분묘 뒤의 반달 모양으로 쌓은 둔덕]을 둘렀는데, 봉분 뒤 사성 하단에는 3단의 장방형 석재를 받치고, 사성 좌우 양 끝단에는 장방형의 받침돌로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사성 형태는 아버지 이집 묘의 형태를 계승한 것이다.
상계에는 묘표를 두었는데, 봉분 동쪽[좌측]에 옆으로 돌려 세웠다. 묘표는 팔작지붕의 개석에 문양이 없는 대석을 갖춘 옥개 방부형(屋蓋方趺形)의 비석이다. 비신은 오석(烏石)[흑요암]으로 제작하여 18세기 이후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묘표를 세운 연대는 ‘황명 숭정 기원 무진 지후 일백삼십삼 년 경진 사월 일 립(皇明崇禎紀元戊辰之後一百三十三年庚辰四月日立)’으로 1760년(영조 36)이다. 묘표는 개석 106×75×40㎝, 비신 62×30×130㎝, 대석 106×80×56㎝ 규모이다. 석상은 계체석(階砌石)을 뒷받침 삼아 하계에 조성하였으며, 족석을 받쳤다. 18세기에 주로 만들었던 석상처럼 크고 두꺼우며 표면에 마정질을 하였다.
향로석은 육각 향탁 형태로 운족(雲足)의 길이가 짧아지고 문양은 단순화하였다. 문석인은 총 높이 144㎝로, 이집의 석인보다 규모가 커졌다. 양관과 조복을 갖춘 석인으로 뒷면 후수에는 여의운문(如意雲紋)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는 망 부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홀을 든 인체 묘사나 세부 복식의 표현 등이 실제적이어서 18세기의 사실적인 경향이 다소 반영되었다. 석망주는 별다른 문양 없이 단순화하였고, 총 높이는 165㎝이다. 이주진 묘는 아버지 이집 묘를 범본으로 삼아 석물을 배치하고 구성을 결정하였으며, 18세기의 형식과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금석문]
묘표 비신 앞면에는 ‘유명 조선국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덕수 이공 주진 지묘 정경부인 여흥 민씨 부좌(有明朝鮮國崇政大夫行吏曹判書德水李公周鎭之墓 貞敬夫人驪興閔氏祔左)’라고 새겼다. 뒷면의 제목은 ‘유명 조선국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좌부빈객 덕수 이공 정경부인 여흥 민씨 합장 묘표 음기(有明朝鮮國崇政大夫行吏曺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副賓客德水李公貞敬夫人驪興閔氏合藏墓表陰記)’로 이주진의 생애와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적고 있다. 비문은 생질인 홍문관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쓰고, 아들인 이은(李溵)이 추기(追記)하였다.
[현황]
이주진 묘는 18세기 이후 조성된 묘역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다만 석물들은 다소 지의류(地衣類)가 보이고, 변색이 진행되었다. 덕수 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주진 묘는 덕수 이씨 문중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사성의 조성이나 봉분에 호석을 두른 점, 동자석인을 설치한 점 등은 덕수 이씨만의 조형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 계승 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