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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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Dolmens |
이칭/별칭 | 지석묘(支石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백종오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
[개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가운데 하나로 큰 돌을 이용하여 돌상자 모양의 무덤방을 만든 후 그 위에 큰 돌을 덮어 놓은 형태를 말한다. 고인돌이란 명칭은 큰 돌을 괴고 있다는 뜻의 괸돌(고임돌)에서 유래되었다. 고인돌을 가리키는 말은 각 나라별로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고, 유럽에서는 켈트어에 기원을 둔 탁자[Dol]와 돌[Men]을 합쳐 돌멘(Dolmen)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테이블 스톤(Table stone)이라고도 하나, 일반적으로 거석(巨石)이란 뜻을 가진 메걸리스(Megalith)가 주로 쓰인다.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6만여 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을 합하여 3만여 기 이상이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조밀한 분포권을 이루고 있다. 고인돌의 형식은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 등으로 분류된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사람 뼈·청동제 무기류·간돌검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껴묻거리가 있으며, 이러한 유물로 고인돌이 축조된 시기의 사회상을 추정할 수 있다.
[연구 현황]
충주 지역에서 고인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강점기로, 대소원면 만정리 고인돌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만정리 고인돌은 개석을 갖춘 5기가 도로 부근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60년대에 지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신니면 화석리에 고인돌이 있었다는 견해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충주의 고인돌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 조사는 1980년대에 이루어진 충주댐 건설과 크게 관련된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 지역 문화 유적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고인돌이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이는 남한강 유역의 고인돌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때 지동리 고인돌, 함암리 고인돌, 하천리 유적 등이 발굴 조사되었고, 충주 신청리 고인돌, 칠금동 고인돌, 충주 조동리 고인돌, 풍동 고인돌, 가주동 고인돌, 탑평리 고인돌 등이 지표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지동리 고인돌은 동량면 지동리의 남한강 지류인 제천 천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하며, 경희대학교에 의해 1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 돌널무덤 3기도 발굴 조사되었다. 함암리 고인돌은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칠성바위로 불리는 9기의 고인돌이 강을 따라가면서 열을 지어 분포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인돌의 하한 연대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하천리 고인돌은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 돌널무덤 6기도 확인되었다.
이 밖에 충청북도에서 발간한 『문화재지』에는 살미면 용천리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17기의 덮개돌이 보고되기도 하였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 충주 가주동 고인돌이 발굴 조사되었다. 가주동 고인돌은 달천이 굽이쳐 흐르는 지역의 구릉에 위치하며, 개석식 2기가 확인되었다.
[입지 조건]
충주의 고인돌은 남한강과 그 지류천 등 물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위치해 있다. 대부분 남한강 유역의 평지나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 등의 큰 하천과 그 지류천이 매우 발달하였다. 이 하천들은 그 언저리에 석회암지대와 충적지대가 발달해 있으며, 구릉지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 갖춰져 있다.
[구조와 부장품]
충주 지역 고인돌은 대부분 개석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방은 대부분 산줄기와 강물 등 주변 지세와 나란한 방향으로 놓여 있다. 특히, 함암리 고인돌의 경우는 피장자의 머리가 강 하류 쪽에 두어진 점과 무덤방의 긴 방향이 덮개돌과 다른 방향인 점이 주목된다. 부장품은 토기·석기·꾸미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