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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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 池氏 |
영어공식명칭 | Chungju J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본관 | 충주 지씨 본관 - 충청북도 충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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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충주 지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은행리 |
세거|집성지 | 충주 지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은행리 |
성씨 시조 | 지경 |
입향 시조 | 지계한 |
[정의]
지경을 시조로 하고 지계한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충주 지씨(忠州 池氏)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의 홍농(弘農) 사람으로 자는 자운(自雲)이며 호는 암곡(巖谷)이다. 중국의 송(宋) 태조(太祖) 시기에 태학사(太學士)로 나라의 문물 제도를 구비하는 데 노력하였다. 지경은 951년(광종 2) 봉사관(奉使官)으로 임명을 받아 고려에 사신으로 왔는데 지경의 풍부한 식견과 경험이 필요하여 고려 조정에서 정착을 권하였다. 지경은 중국의 승인을 얻어 960년(광종 11) 정착하였으며, 이후 고려 조정에 진출하였다. 1003년(목종 6) 9월 9일 101세로 사망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선의(宣懿)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입향 경위]
충주 지씨가 충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은 지경의 5세손 지종해(池宗海) 때이다. 지종해는 평장사를 역임한 김여신의 딸과 혼인하고 충주에서 살았으며, 1071년(문종 25) 11월 고려 조정으로부터 충주를 식읍으로 하는 충원백(忠原伯)에 봉작을 받았다. 그후 자손들도 충주 지역을 봉작으로 받았다. 이후 20세 지계한(池繼漢)이 보령현감을 지낸 뒤 출세를 포기하고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은행리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청주에 입향하게 되었다. 지계한은 1467년(세조 13) 전의현감, 1474년(성종 5) 보령현감을 제수 받아 관직 생활을 하였다. 지계한은 당시 권세 있던 윤필상(尹弼商)과 사돈지간이었다. 1474년 윤필상은 한명회(韓明澮), 노사신(盧思愼) 등 권신들이 전권을 휘두르며 이조(吏曹)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침해하자 분개하여 이조판서를 사직하였다. 윤필상의 사직 사건을 계기로 지계한도 의리를 지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계한은 1477년(성종 8) 사망하였으며, 큰아들은 덕산현감을 지낸 지준(池浚)이다. 지계한은 은행리에 세거한 덕산공파(德山公派)의 시조이다.
[현황]
200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의하면 충주 지씨는 191가구, 622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지계한의 묘는 남일면 은행리에 있다. 지덕해(池德海)의 묘는 원래 대전시 유성구 신봉동에 있었으나 2001년 6월 은행리로 이장하였다. 4세손 중에서 ‘해(海)’ 자 돌림을 쓰는 8명의 뛰어난 인물을 충주 지씨의 ‘팔해(八海)’라고 부르는데 지덕해는 팔해 중 한 명이다. 지여해는 1636년 병조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간청하여 적진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사하여 전사 소식을 들은 인조가 추증하였다. 이후 숙종 때인 1713년 충신각이 세워졌으며, 청주 검암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