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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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山 申氏 |
영어공식명칭 | Pyeongsan Si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본관 | 평산 신씨 본관 - 황해북도 평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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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평산 신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성씨 시조 | 신숭겸 |
입향 시조 | 신자숭 |
[정의]
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신자숭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개설]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한다. 신숭겸은 궁예가 세운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이었으나 궁예의 폭정이 계속되자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공로로 고려 개국원훈대장군(開國元勳大將軍)에 올랐다. 왕건이 신숭겸에게 평산을 본관지로 하사하여 평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청주목에 주요 성씨로 오를 만큼 청주 지역에서 연원이 오래된 문중 가운데 하나이다.
[연원]
평산 신씨는 시조로부터 14세 신익지(申翼之)까지 내려오다가 15세 신아(申雅)에 이르러 각 파로 분파되었다. 각 파와 중시조를 열거하면 신아(申雅)의 밀직공파(密直公派), 신정도(申丁道)의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신정리(申丁理)의 장령공파(掌令公派), 신감(申鑑)의 현령공파(縣令公派), 신개(申槩)의 문희공파(文僖公派), 신효(申曉)의 정언공파(正言公派), 신하(申夏)의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신호(申浩)의 사간공파(思簡公派), 신연(申演)의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신기(申淇)의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신효창(申孝昌)의 제정공파(齊靖公派), 신호(申灝)의 전서공파(典書公派), 신인기(申仁錡)의 이상공파(貳相公派), 신득청(申得淸)의 판사공파(判事公派), 신유(申維)의 진사공파(進士公派), 신강(申綱)의 감찰공파(監察公派), 신시견(申時見)의 판윤공파(判尹公派), 신도지(申道之)의 참판공파(參判公派), 신우방(申佑邦)의 군수공파(郡守公派) 등이다.
[입향 경위]
평산 신씨의 충청북도 청주시 입향조는 밀직공파 신아의 후손인 19세손 신자숭(申自崇)이다. 신자숭을 중시조로 하는 일가가 집의공파(執義公派)로 분파되었다. 신자숭은 자가 덕언(德彦)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가문이 쇠한 것을 두려워하여 과거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무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뜻을 거슬러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곧 사면되어 돌아왔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집안 식솔을 이끌고 청주의 서강(西江)에 정착하여 일생을 마쳤다. 부인은 전주 최씨이다.
[현황]
200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평산 신씨는 373가구, 1,188명이 거주하였다.
[관련 유적]
신자숭의 묘소는 청주시 흥덕구 지동동 야양산[현 부모산] 서쪽 기슭 고장산(古壯山)에 있다. 신자숭의 현손 신수(申壽)가 「집의공휘자숭행장(執義公諱自崇行狀)」을 찬하고, 후손 신동석(申東奭)이 묘표를 지었다. 후손 우강(愚江) 신천상(申天祥)의 묘소는 흥덕구 서촌동 비선동(飛仙洞)에 있다. 우석(友石) 신해철(申海澈)은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후 191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김창숙, 김복한과 함께 조선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하였다. 귀국 후에도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김복한의 유고를 수습 정리하여 후일 『지산집(志山集)』을 출간하는 바탕이 되었다. 신해철의 묘소는 지동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