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 청주 정씨 본관 - 충청북도 청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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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청주 정씨 집성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 |
성씨 시조 | 정극경 |
입향 시조 | 정책 |
[정의]
정극경을 시조로 하고 정책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개설]
청주 정씨(淸州 鄭氏)는 고려 의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한다.
[입향 경위]
청주 정씨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이어 온 명문가인데, 본관을 청주로 삼았으나 청주에 세거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6세손 정책(鄭幘)은 충숙왕 때 대호군을 거쳐 응양군상호군을 지내고 이어 판선공감사로 청하군(淸河君)에 봉하여졌으며 이후 서원백(西原伯)[현 충청북도 청주시]에 올랐으므로 후손은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그리고 큰아들 정오(鄭䫨)가 공민왕 때 일등공신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며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청주 정씨는 후손이 번연하면서 세거지가 전국으로 분포됨에 따라 지방의 지명 또는 입향조의 관명 혹은 아호나 시호를 따서 분파를 이루어 모두 39개 지파를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 정탁(鄭琢)[1526~1605]이 있다. 정탁은 선조 때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우찬성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밖에 영의정에 추증된 정곤수(鄭崐壽)와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정구(鄭逑)[1543~1620], 선조 때의 학자 정사성(鄭士誠)이 있다.
[현황]
1985년 전국 인구 조사에서 청주 정씨는 8,802가구에 3만 6308명이 있었다. 2000년 인구 조사표에는 1만 2271가구에 3만 9256명이었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학자이자 대문장가인 정구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집성촌이 있고, 또한 충청북도 청주시에는 청원구 우암동에 정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