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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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楊氏 |
영어음역 | Cheongju Yangssi |
영어의미역 | Cheongju Y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오갑균 |
[정의]
충청북도 청주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시조 양기(楊起)는 중국 출신으로 원(元)나라에서 중서성 정승을 지냈으며, 고려(高麗)원종(元宗) 때에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배종하고 들어와서 정착하였다.
그 후 양기는 원나라에 가서 공물을 삭감케 한 공으로 삼한창국공신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지고 청주를 관적(貫籍)으로 내림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청주양씨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양기는 6형제를 두었고 그 후손이 각기 분파를 이루어 전국에 분포되었고 또한 분적하였다.
청주양씨에서 분적한 안악양씨(安岳楊氏)·밀양양씨(密陽楊氏)·남원양씨(南原楊氏)·중화양씨(中和楊氏) 등이 본관을 달리하고 있다.
[세거지]
청주 근교에 청주양씨의 집성촌은 청원군 옥산면 사정리·호죽리에 살고 있으며, 전국에는 2000년 인구조사표에 의하면 8,548가구에 27,437명이다. 전국에 분포된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화성시 마도면,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논산시 상월면,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과 화산면·달성군 다기면·경주시 화북면, 내남면, 강동면·칠곡군 칠곡면,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진창리,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 등이다.
[인물]
청주양씨는 고려말에 명문씨족으로 부상하여 조선조에서도 11명이 문과에 들어 벼슬하였다. 양백연(楊伯淵)[?~1379]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으로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 때의 공으로 추성익위공신이 되고 1365년 밀직부사로 원나라에 가서 노국공주의 죽음을 알리고 돌아와 서북면 도순위사가 되었다. 1370년 빈번한 왜구(倭寇)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찬성사를 지냈다.
양치(楊治)[1400~1485]는 1437년(세종 19) 김종서(金宗瑞)와 6진 개척에 공을 세워 영광군수가 되었으며 그 후 황해도병마사와 함경도병마사에 올랐으나 1453년(단종 1) 김종서 등이 화를 입자 고향인 포천 기당에 은거하였다.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조선의 문신이며 서예가이다. 양희수의 아들로 양사준(楊士俊)·양사언·양사기(楊士奇) 삼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평창군수·강릉부사·함흥부윤을 역임하고 회양군수를 지냈으며 유명한 시조를 남겼다.
양응춘(楊應春)[ ~1592]은 1592년(선조 25) 현감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을 따라 청주에서 적을 무찌르고 이어 금산싸움에 참가하여 용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갈산사에 배향되었다.
[묘역]
성씨의 세거지에는 묘역과 사당, 정려 등 기념물이 설치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청주 근교에는 없으며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에서 묘소 일부가 보이고 있다. 타지역 세거지에는 시조인 양기를 봉향하는 사당으로 충헌사(忠憲祠: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진창사(창녕군 유어면 진창리)·사충사(보성군 벌교읍 마동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