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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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慶氏 |
영어음역 | Cheongju Gyeongssi |
영어의미역 | Cheongju Gy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갑균 |
[정의]
충청북도 청주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시조는 청주인 경진(慶珍)으로 고려 명종 때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그 아들인 경대승(慶大升)은 청렴한 인물로 장군이 되어 정중부의 횡포정치를 제압하고 쇄신정치를 하였다.
청주경씨의 1세(世)는 경번(慶蕃)으로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올라 호부상서평장사에 이르고 청주에 세거하였으며 2세는 경수(慶綏)로 통례문사를 지내고 3세인 경사만(慶斯萬)은 우대언(右代言)이었고 4세 경복흥(慶復興)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세거지]
청주경씨의 후손들은 21개 분파를 형성하여 전국에 분포하였으며, 청주 근교의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징군파(徵君派)는 괴산군 청안면, 서봉공파(西峯公派)는 청원군 문의면, 월송공파(月松公派)는 충주, 적성공파(積城公派)는 음성군, 경역공파(經歷公派)는 청주, 아산공파(牙山公派)는 청주·충주, 낭성군파(浪城君派)는 충주, 보성공파(寶城公派)는 괴산군 연풍면이다.
[인물]
청주경씨는 단본으로 고려시대에 경대승을 비롯하여 경유, 경사만, 경복흥(慶復興)[?~1380], 경보(慶補), 경의(慶儀)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경준, 경세창, 경수공, 경혼, 경섬, 경취 등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충효와 절의의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일제에 저항한 인물로는 경석조[1881~1957]와 경권중[1871~1919]을 들 수 있다.
경석조는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국내에서 저항운동에 참여하다가 1924년 만주 길림으로 탈출하여 각종 애국단체에 참여하여 항쟁하다가 해방 후 환국하였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1991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권중은 1907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전남 구례, 곡산 등지에서 왜병과 항전하였으며,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수면에서 군중 궐기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가출옥 후 사망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청주경씨는 2000년 전국인구조사표에 의하면 3,462가구에 11,128명이다.
[묘역]
청주경씨의 선대 묘역은 상당구 지북동 산 32-2번지 모산(茅山)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세 경번, 2세 경수, 3세 경사만의 묘가 있으며 장군공 경대승의 추원단(追遠壇)이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사묘(祀廟)인 영모재(永慕齋)와 세적비각(世蹟碑閣)이 있다.
경연(慶延)은 청주 모산 출신으로 세조·성종 연간에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향촌교화에 귀감이 되었다. 1478년(성종 9)에 정려되었으며 1686년(숙종 12)에 세운 효자각이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에 있다. 묘역도 청원군 남일면에 있으며 상당구 금천동에 있는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