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167
한자 韓確
영어음역 Han Hwak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석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403년연표보기
몰년 1456년연표보기
본관 청주(淸州)
자유(子柔)
간이재(簡易齋)
아버지 한영정(韓永矴)
시호 양절(襄節)
상훈 정난공신 1등|좌익공신 1등

[정의]

조선 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이다.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아들이며, 덕종의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成宗)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활동사항]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고,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에 제수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태종(太宗)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 1월 명나라의 책봉사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자, 1429년에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었다.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죽었다.

[상훈과 추모]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에 봉하여졌다. 1455년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에 개봉되었다. 1470년(성종 1)에 세조 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의의와 평가]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입신(立身)하고 출세하였지만,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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