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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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春節洪娘 |
영어음역 | Chunjeol Hongn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학 |
[정의]
조선 전기 청주의 명기(名技).
[생애]
춘절(春節)은 명종 때 청주의 기생으로 자색(姿色)이 뛰어나고 가무(歌舞)를 잘하였다.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이 명산을 두루 유람할 때 청주를 지나가게 되자 청주목사는 성제원이 외롭고 적적함을 염려하여 춘절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동주는 당대의 뛰어난 문장호걸(文章豪傑)로 재물과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분이다. 만약 이번 행차에 네가 동주와 동침을 하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춘절은 성제원을 따라 원근의 명승지를 다니며 여러 달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성제원은 산수를 유람하며 좋은 경치를 만나면 곧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어 그림 위에 시제(詩題)를 썼으며, 달 밝은 밤이면 춘절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며 춘절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하지만 끝내 춘절을 범하지는 않았다. 유람을 끝내고 떠나는 날 동주는 춘절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범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관계가 있다 하고 너를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생계는 오직 이 그림밖에 없으니 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 나를 잊지 않는 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제원이 떠나고 난 후 춘절은 청주목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고하여 기적(妓籍)에서 물러나 오로지 성제원의 문장과 풍채를 흠모하며 살아갔다. 춘절은 성제원이 주고 간 시화들을 화첩(畵帖)으로 만들어 유람을 온 사람이 있으면 그림을 보여주며 후원금으로 생계를 이어가곤 하였다. 성제원이 죽고 형의 손자가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청주를 지나가다가 청주목사로부터 지난 이야기를 듣고는 춘절을 불러보니 이때 춘절의 나이 이미 80세가 넘었다. 춘절은 성제원을 만난 듯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비록 당시에 관계는 없었으나 어찌 동주를 향한 마음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고이 간직했던 화첩을 내보이니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면서 춘절을 우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난리 중에 그 화첩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