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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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詩 |
영어음역 | Hansi |
영어의미역 | Chinese Poem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용만 |
[정의]
한문으로 지어진, 청주 또는 청주의 유적을 대상으로 지은 시 작품.
[개관]
청주는 국토의 중심부로 땅이 비옥하여 호걸이 많이 나고 사대부가 살만 한 땅으로 여겨졌다. 그에 걸맞게 이곳을 지나는 시인이나 청주지역의 문사가 남긴 한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이어진 한시는 주로 청주 공북루(拱北樓)의 제영시(題詠詩)가 다수를 차지한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공민왕(恭愍王)이 남쪽으로 향하다 청주에 머물며, 신하들과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1328~1396] 등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이들은 청주의 산천과 임금의 공덕을 오언율시(五言律詩)로 읊었다.
조선시대의 한시작품은 세종(世宗)의 초수(椒水) 행차와 그에 동행한 신하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당시 청주목이던 화양동(華陽洞)에 송시열(宋時烈)이 거처하면서 그 문인들이 시를 읊었다. 이외에도 청주에 살면서 청주를 한시로 노래한 시인들은 근대화로 한시의 문화적 의미가 퇴색할 때까지 청주와 그 유적을 노래하였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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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 오자 수정 | 조선시대의 한시작품은 세종(世宗)의 초수(椒水) 행차와 그에 동행한 신하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당시 청주목이던 화양동(華陽洞)에 송시열(宋詩烈)이 거처하면서 그 문인들이 시를 읊었다. 이외에도 청주에 살면서 청주를 한시로 노래한 시인들은 근대화로 한시의 문화적 의미가 퇴색할 때까지 청주와 그 유적을 노래하였다. -> 조선시대의 한시작품은 세종(世宗)의 초수(椒水) 행차와 그에 동행한 신하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당시 청주목이던 화양동(華陽洞)에 송시열(宋時烈)이 거처하면서 그 문인들이 시를 읊었다. 이외에도 청주에 살면서 청주를 한시로 노래한 시인들은 근대화로 한시의 문화적 의미가 퇴색할 때까지 청주와 그 유적을 노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