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071
한자 李敏雨
영어음역 Yi Min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915년연표보기
몰년 2004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인석(仁石)
아내 김동분(金東粉)

[정의]

청주에서 성장한 정치인.

[학력]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입학하여 이듬해인 1941년에 중퇴하였다.

[활동사항]

30여 년 야당 외길을 걸으며 6선에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계의 거목(巨木)이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두 김씨(金氏)와 같은 세(勢)를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1980년대 중반 정치 암흑기에 제1야당 당수로서 정계의 핵으로 활약했다. 해방직후인 1946년에는 충북신보 총무국장 겸 영업국장, 1948년 청주시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1987년까지 정치 일선에서 활동했다. 그가 국민에게 깊이 인식된 시기는 신민당 총재로 있던 1985년부터 1988년 사이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측과 함께 신민당을 만들었던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은, 그를 총재로 추대하고 정치 1번지로 불렀던 서울 종로·중구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였다. 제4, 제5, 제9, 제10대 총선에서 모두 충청북도 청주에서 당선되었던 이 전 총재는 “어려운 일을 회피하면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며 이를 받아들이고 당선되어‘신민당 바람’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86년 말 13대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직선제를 관철하려던 두 김씨의 구상과 그의 생각이 어긋난 것이 30년 정치인생이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 총재는 홍사덕 당시 신민당 대변인 등의 조언을 받아 먼저 민주화 조치 및 내각제 개헌 수용을 줄기로 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두 김씨 세력은 집단 탈당하여 신민당을 와해시켰고, 충격을 받은 이 전 총재는 1987년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는 1999년까지 몇십년을 서울 삼양동 옛 집에서 살며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민주당 구파와 진산계(珍山系)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제9대 국회 때 구신민당 안에서 김영삼계와 이철승계 사이에 강·온 노선 경쟁이 벌어졌을 때 김영삼을 지지한 후 민주산악회, 민추협 활동을 같이하면서 김영삼과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8.09 <상세정보> 및 <정의> 수정 청주 생졸 -> 논산 생, 서울 졸 청주 출신의 정치인 -> 청주에서 성장한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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