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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성동 감나무골 유황제와 향나무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000
한자 業城洞-祭-香-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업성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 의례|동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유황제]|단오[향나무제]
신당/신체 대동샘[유황제]|향나무[향나무제]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업성동에서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

[개설]

업성동은 본래 천안군 북이면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선바위라 불리는 바위 무리가 있어서 암석리 또는 입석리로 불리다가, 부르기 쉽게 그 음만 차용하여 업성리가 되었다.

업성리에는 감나무골[柿木洞]을 비롯하여 세기실[石基室]·노근다리[外洞]·선바위[立岩洞]·밤골[栗洞]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그중에서 감나무골은 1980년대 후반까지 정월 초사흗날에 유황제[정제(井祭)]를 지내 왔다. 그러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사를 중단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마을에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에 정성을 드리게 되었다. 이를 일컬어 향나무제라 한다.

[연원 및 변천]

감나무골 주민들은 마을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위하여 마을의 대동샘에 정성을 드렸는데 이것이 유황제이다. 풍농은 곧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농사의 성패는 비가 때맞추어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는 뜻의 우순풍조(雨順風調)에 달렸고 그 핵심은 기후가 농사일에 맞아 물을 제때에 원활히 공급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황제의 ‘유황’은 지역어로서,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의 대표 격인 용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제의 장소의 유형을 감안하면 수신에게 지내는 정제(井祭)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상수도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대동샘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이는 유황제의 중단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에 업성 저수지의 제방 공사를 하면서 대대로 신성시하던 선바위를 없애 버렸다. 그런데 유황제가 중단되고 마을에서 중요시하는 바위를 없애고 난 다음부터는 젊은이들이 급사하는 등 마을에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결국 용한 무당을 찾아가서 그동안의 사정을 털어놓았고 무당은 그 해결책으로, 동네에 있는 고목에 치성을 드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하여 마을에 있는 향나무에 정성을 드리는 향나무제가 시작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먼저 유황제를 지냈던 대동샘은 마을 가운데에 있었다. 1년 내내 수량이 풍부하고 맑아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수도가 보급된 이후에는 이곳 샘도 모두 메워 버렸다.

주민들이 다시 모시게 된 향나무는 높이가 무려 4m에 이르고 2012년 현재 수령도 최소 500년 이상 되었으니, 나무의 종류를 감안하면 흔치 않는 고목(古木)인 셈이어서 예로부터 영험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바위가 훼손될 무렵부터 나무가 차츰 죽어 갔는데, 주민들이 뜻을 모아서 정성을 드리자 신기하게도 되살아났다고 한다. 또한 향나무제를 지낸 후부터는 마을도 평안해졌다고 한다.

[절차]

먼저 유황제는 마을에서 섣달그믐에 책력을 보아서 제관·축관·심부름꾼 등 세 사람을 뽑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관을 가리켜 ‘주당’이라 불렀다. 제관 일행은 정월 초하룻날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관은 초사흗날까지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근신한다. 주민들도 마을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었고, 반대로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동제 기간에는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제의에 드는 비용은 동계(洞契)의 기금으로 충당하며, 부족하면 집집이 쌀을 나누어 낸다. 제물은 흰무리[백설기]·삼색과실·통북어·미역국·술 등을 준비한다. 흰무리는 햇벼를 집에서 직접 찧어서 올리고 술도 쌀과 누룩으로 직접 빚어 올린다. 북어는 눈이 성한 것으로 사서 떡시루 양쪽에 꽂는다.

또한 주민들은 정월 초에 깨끗이 대동샘을 품는다. 샘 안팎을 정결하게 한 뒤 사방에 황토를 펴고 짚으로 만든 맷방석으로 우물을 덮는다. 이렇게 샘을 품은 뒤에는 제물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길어 갈 수가 없다.

초사흗날 저녁, 인적이 끊긴 시간에 주당 내외와 축관·심부름꾼, 네 사람은 샘으로 향한다. 제관은 샘 앞에 가지런히 짚을 깔고 제물을 차린다. 제사는 유교식으로 정숙하게 진행된다. 주당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한 후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소지(燒紙)[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일]를 올리는데 마을 전체의 무사태평을 비는 유황 소지[용왕 소지]를 올리고 집집이 대주 소지를 올려 준다. 정성을 다 드리고 나면 제물 일부를 샘가에 떼어 놓고, 미역국은 세 군데로 나누어서 우물 속에 뿌린다.

한편, 새롭게 시작된 향나무제는 단오에 지내고 있다. 제관은 별도로 선출하지 않고 마을 대표인 통장과 노인회장 등 임원들이 맡는다. 제사 비용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충당하는데 대개 마을 청년회와 기업체의 후원금이다. 제물로는 돼지머리·시루떡·삼색과과·포·술 등을 장만한다. 단옷날 오전 열 시가 되면 주민들은 향나무 앞으로 모여서 정성을 드린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 제관을 맡아서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이어서 마을 대표들이 차례로 잔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마을의 무사태평을 빌며 동 소지[마을 소지]를 올린다.

[부대 행사]

마을에서 정성을 드리고 난 후에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서 음복을 한다. 향나무에 정성을 드린 이후부터는 단옷날에 마을 잔치를 열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회관 근처의 느티나무 밑에서 온종일 풍물을 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현황]

1980년대 후반에 유황제가 중단되고 이후부터는 향나무제를 지내 오고 있다. 옛 마을의 정취는 꽤 많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2012년 현재까지 향나무에 정성을 드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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