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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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棨 |
영어공식명칭 | Yu Gye |
이칭/별칭 | 무중(武仲),시남(市南),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출생 시기/일시 | 1607년 - 유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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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유계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유계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 유계 중림찰방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유계 세자시강원설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58년 - 유계 세자시강원문학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유계 홍문관부제학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유계 사헌부대사헌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63년 - 유계 이조참판·승정원도승지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664년 - 유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03년 - 유계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고 문충(文忠) 시호를 받음 |
거주|이주지 | 임천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
거주|이주지 | 금산 - 충청남도 금산군 |
유배|이배지 | 임천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
유배|이배지 | 온성 -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
유배|이배지 | 영월 - 강원도 영월군 |
묘소|단소 | 유계 묘소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상중와길 74-88[와초리 산96-1] |
사당|배향지 | 칠산서원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부흥로 197-2[칠산리 384]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기계(杞溪) |
대표 관직 | 도승지 |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
[가계]
유계(兪棨)[1607~1664]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유함(兪涵)이고, 할아버지는 수안군수 유대경(兪大敬)이다. 아버지는 예빈시참봉 유양증(兪養曾)이고, 어머니는 남이신(南以信)의 딸 의령 남씨(宜寧 南氏)이다. 부인은 이산악(李山岳)의 딸 광주 이씨(廣州 李氏)이고, 아들은 유명윤(兪命胤)·유명필(兪命弼)·유명흥(兪命興)이다.
[활동 사항]
유계는 1607년(선조 40)에서 태어나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3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634년 중림찰방을 지냈다. 1636년 승정원주서와 세자시강원설서를 역임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주장하였다. 또한 청나라 진영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신(臣)’ 자를 쓰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에서 조선에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자 유계는 임천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나서는 임천 지남동(指南洞)에 집을 짓고 ‘시남(市南)’이라 이름 붙였으며, 1639년에는 금산 마하산(麻霞山) 밑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며 강학 활동을 하였다.
유계는 1644년 이후 승정원주서·병조좌랑·예조좌랑을 거쳐 무안현감을 지낸 뒤 홍문관수찬·병조정랑·홍문관교리·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인조(仁祖)의 묘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앞서 ‘인종(仁宗)’이 있는데 다시 인(仁) 자를 쓰는 것이 부당하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 이후 강원도 영월로 이배되었다가 1652년에 풀려났다. 1658년 이후 세자시강원문학·의정부검상·병조참지·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홍문관부제학을 거쳤고, 1650년(현종 1) 제1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宋時烈)을 비호하고 윤선도(尹善道)와 권시(權諰) 등 남인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1662년 이조참의·예조참의·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63년 이조참판·한성부우윤·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1664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계의 저술로는 문집인 『시남집(市南集)』을 비롯하여 『강거문답(江居問答)』, 『가례원류(家禮源流)』, 『여사제강(麗史提綱)』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례원류』는 김장생(金長生)의 예설을 토대로 하여 유계의 학설을 밝힌 저서로, 훗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묘소]
유계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상중와길 74-88[와초리 산96-1]에 있다. 유계의 신도비는 며느리 남원 윤씨의 절행을 새긴 정판과 함께 ‘유계신도비및남원윤씨절행정판’이라는 명칭으로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유계는 1703년(숙종 29)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부흥로 197-2[칠산리 384]에 있는 칠산서원(七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