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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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靜退書院 |
영어공식명칭 | Jeongtoiseowon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634년 - 정퇴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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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정퇴서원 훼철 |
원소재지 | 정퇴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서원골] |
성격 | 서원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서원골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설 교육기관.
[개설]
1634년(인조 12)에 창건된 정퇴서원(靜退書院)은 원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향사하기 위한 서원이었는데,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와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을 함께 배향하였다. 또한 1634년 정퇴서원 옆에 별도로 충효당(忠孝堂)을 지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송암(松庵) 강봉수(姜鳳壽)를 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정퇴서원의 창건은 온양의 유학자 시암(時菴) 조상우(趙相禹)[1582~1657]가 주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1573~1654], 포저(浦渚) 조익(趙翼)[1579~1655],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1573~1635], 창강(滄江) 조속(趙涑)[1596~1668],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1642],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1595~1658] 등을 들 수 있다.
[위치]
정퇴서원은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서원골에 터가 있다. 아산 시내에서 지방도 623호선을 따라 중리에 이르면, 금곡초등학교를 지나기 전에 오른쪽 비포장도로의 샛길이 있다. 이 길로 300m 정도 들어간 골짜기 안쪽 끝에 정퇴서원의 터가 남아 있다. 현재 서원은 없어졌지만 서원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변천]
『온주지』에 실려 있는 조상우의 정퇴서원 「창건통유문」에 의하면, 온양군의 남쪽 5리[약 2㎞]쯤 되는 자하동의 아래에 정퇴동(靜退洞)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명칭이 정암과 퇴계의 머리글자와 같으니 ‘군자의 골’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두 선생의 도덕을 추앙하기 위해 서원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 골짜기의 속칭은 점토곡[점토골]이었다고 한다.
만전당 홍가신을 종향하는 이유로는 홍가신이 두 선생의 후학으로 두 선생의 도를 흠모하여 일생의 공정이 성·경 2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광해군 조에 치사하여 절조를 지켰고, 살던 지역이 비록 온양과 아산 두 고을의 사이라고는 하지만 전지는 주로 온양에 있었으며 유관(遊觀)하던 발자취는 자하동의 정퇴곡에 자주 미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전 홍가신의 정퇴서원 봉안 제문은 후천 황종해가 찬하였다.
창건 당시의 서원 위치는 동포 맹희도가 서일위로 조광조·이황과 합사되었고[이상은 주향], 만전당 홍가신은 배향되었으며, 별도로 충효당(忠孝堂)이 정퇴서원의 옆에 세워져서 충무공 이순신과 창암 강봉수를 향사하였다. 그 후 정퇴서원의 건립을 주도했던 시암 조상우가 1692년에 추배되고, 설봉 강백년과 매곡 조이후가 각각 1702년, 1717년에 추배되었으며 양심당 윤현이 1702년에 충효당에 추배되었다.
『서원가고』와 『동국원우록』에는 추배되는 조상우·강백년·윤현·조이후가 이순신·강봉수와 함께 모두 충효당에 별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퇴서원 사적과는 차이가 있다. 서원 위차에 대해서도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맹희도가 배향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퇴서원 사적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아마 후에 위차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퇴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
[현황]
정퇴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현재 정퇴서원이 있던 자리는 수풀이 우거지고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수년 전 집을 지었다가 허물었던 적이 있다고 하며 서원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정퇴서원의 건립을 주도했던 시암 조상우는 온양 매곡[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매곡리] 출생으로 사계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고 동춘 송준길, 포저 조익, 잠야 박지계, 신독재 김집, 후천 황종해 등 당대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또한 정퇴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안방준, 조익, 박지계, 조속, 황종해, 조극선 등 당대의 석학들이다. 이렇듯 정퇴서원 건립은 지역의 유학자들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또한 정퇴서원이 중심이 되어 조선 후기 온양군 지역의 유학 발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미 동서 분당이 이루어진 뒤에 세워진 서원이지만 붕당에 얽매이지 않고 퇴계 이황도 모셨다는 점이 의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