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83 |
---|---|
한자 | 御路 |
이칭/별칭 | 거둥길,연도,연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조선시대 수도 한성에서 출발하여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온양행궁까지 왕이 오고 가던 길.
[개설]
어로(御路)는 왕이 다니던 길을 말하며 거둥[擧動]길, 연도(輦道), 연로(輦路)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행행(行幸) 중에서 온행(溫幸)은 이동거리와 목적을 고려하면 가장 긴 거둥이었다. 특히 왕이 찾는 온천이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온양온천이라면 목적지까지 가는 데만 4일이 소요되었다. 왕이 질병 치료를 위해 목욕을 하는 기간과 다시 올라오는 기간을 고려하면 보통 10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온행 과정]
조선 전기의 온행은 사료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 후기의 온행은 『온행등록(溫幸謄錄)』에 기록되어 있어 내용을 상세히 알 수가 있다. 『온행등록』은 1665년(현종 6)부터 1669년(현종 10)까지 매년 그리고 1717년(숙종 43)에 온양으로 행행한 일에 관한 모든 사항을 날짜순으로 예조(禮曹)에서 정리해 놓은 등록[전례(前例)를 적은 기록]이다. 온행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성을 출발한 어가(御駕)는 한강을 건너 저녁에 과천행궁(果川行宮)에 도착하였다. 한강의 상태에 따라 노량진을 통해 건너기도 하고, 서빙고 쪽으로 건너기도 하였다. 과천행궁에서 저녁을 보내고, 다음 날 다시 출발하여 사근내(沙斤乃) 주정소(晝停所)[임금이 거둥 중에 잠시 머물러 점심을 먹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사근내는 ‘사근천(沙斤川)’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안양천의 일부다. 사근내 주정소를 지나면 어가는 수원행궁(水原行宮)을 향한다. 수원행궁에서 다시 하루 유숙하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한다. 수원행궁을 출발한 어가는 진위(振威) 주정소에서 점심을 먹고 직산행궁(稷山行宮)을 향한다. 진위는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이고, 직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일대이다. 직산행궁에서 유숙한 후 다음 날 아침 출발하여 천안(天安) 주정소에서 점심을 먹고 온양행궁(溫陽行宮)에 다다른다. 온천욕을 마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는 경우 대부분 왔던 길을 돌아갔다. 어가가 경유하는 각 읍마다 유생(儒生), 부로(父老)들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곳곳에서 나와 절을 하였다.
국왕이 온행 중이더라도 국정 운영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수행되었다. 온행을 수행하는 관료 규모는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으며,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관료는 도성 내에서 정상근무를 하였다. 긴급을 요하는 문서의 경우 왕이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 처리하고, 긴급을 요하지 않는 경우 승정원으로 보내 처리하였다. 문서 전송에는 파발(擺撥)을 이용하였는데, 한성과 온양은 대략 9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온행로(溫幸路)는 정리사(整理使)에 의해 준비되었다. 정리사는 행행에 수반하는 각종 경비 문제와 현장 점검을 책임졌다. 호조(戶曹)와 관련된 일이 많았기 때문에 호조판서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엄격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호위군병은 오군영(五軍營)에서 담당했는데, 특히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에서 주로 담당하였다. 무장과 훈련이 가장 충실했기 때문이다. 한강을 경계로 도성의 군병과 경기도 군병 사이 교대가 이루어졌고, 경기 군병이 한강 이남에서 충청도와 경계지역인 소사 지역까지 호위하였다. 소사에서는 충청 군병으로 교대하여 온천까지 충청 군병이 수가(隨駕)[거둥 때에, 임금을 모시고 따라다니던 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