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시에서는 매년 4월에 딸기 축제를 연다. 1997년에 딸기 축제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논산 공설운동장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개최한 이래 폭설이 내렸던 2004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딸기 축제는 논산이 한국 딸기의 메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딸기 생산농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크다. 200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지역 축제가 크게 늘어났는...
-
시묘리라는 지명은 시묘살이를 한 효자가 살았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룬 다음 그 묘 앞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지키는 행위를 이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시묘살이는 아무리 대단한 효자라 해도 직접 실행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시묘살이를 한 효자에게는 국가가 직접 포상을 내...
-
시묘리의 네 마을은 농경지가 적당하게 있어 밭을 갈아먹던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촌도 아니었다. 지주라고 해봤자 백석지기인 방씨네가 있었을 뿐, 대부분 그럭저럭 좁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았다. 매년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쳤고 그때마다 마을 동계나 동네 지주로부터 장례쌀을 빌려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마을재산은 정월에 풍장을 치며 집집마다 걸립을 하고 쌀이나...
-
시묘리는 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는 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있던 조선 전기 유학자 박증의 후손들이 남긴 유물. 박증(朴增, 1461~1517)은 외조부 성삼문의 충절을 추모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32세 되던 1492년(성종 23) 노성현 암천(현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로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이로써 무안박씨 노성파가 형성되었다. 박증이 노성 지역으로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지금까지 노성 지역에 세거하고...
-
시묘골의 노인회장 최재현 씨는 시묘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할 만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31년에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6·25 한국전쟁을 겪었다. 논산농고 제1회 졸업생이며 국가재건에 힘쓰던 시기에 논산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상경하여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에너지 파동으로 사업체는 부도가 나고 결국 고향으로...
-
논산시에서는 딸기를 키우는 농가가 2,000여 가구에 이른다. 15개 읍면동에서 시내권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읍면 지역에 딸기 농가가 분포하고 있으므로 어느 특정지역을 딸기 마을이라고 내세울 수가 없다. 논산은 그야말로 딸기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다만, 딸기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도 체험객을 받아들이는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우리가 시묘리를 ‘딸기 마을’이...
-
전국 딸기 생산량의 13%를 논산딸기가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충청남도 생산량의 55%에 이르는 수치이다. 채운면에서 처음 시작된 논산딸기가 이렇게 크게 확산된 것은 논산 땅의 토질이 재배에 알맞고, 논산딸기를 특화시키려는 논산시와 농민들의 의지 덕분이었다. 딸기의 수익이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딸기재배를 위해 애쓰는 농민도 많고 실제로 품질 좋은 딸기도 많이 나오고 있지...
-
효자농장 의 김은옥 씨는 1960년대 후반에 딸기농사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딸기를 재배하려는 농가가 거의 없었다.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지만, 농사짓기에는 까다로운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노지재배는 어려웠고 비닐하우스가 반드시 필요한데, 하우스 시설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초기에는 대나무를 얇게 자르고 비닐을 덮어 나지막한 하우스를 만...
-
시묘4리 이장 나재완 씨는 일흔 넘은 나이이지만 풍채가 좋고 얼굴빛이며 목소리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인물이다. 그가 서슴없이 풀어내는 거친 농담 앞에서 낯선 이들이라면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넘긴다. 시묘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4리 이장 나재완’을 알고 있을 만큼 동네에서 오랜 세월 많은 일을 해왔다. 네...
-
시묘리 일부 딸기 농가에서는 누구나 마음 놓고 딸기를 그냥 먹을 수 있도록 천적을 활용한 무농약 농법을 활용하고 있다. 딸기의 해충 중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총채벌레’로 딸기 꽃에 벌레가 생기면 꽃의 끝이 흑갈색으로 변색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여 불임이 되어버린다. 이미 열매가 생긴 이후에 벌레가 생길 경우에도 딸기가 다갈색으로 변해버려 먹을 수가 없다. 해충은...
-
시묘4리의 버들골 골짜기 안쪽의 좁고 깊숙한 곳은 일명 ‘일천다랭이골’이다. 다랭이 논이 어찌나 길게 이어지는지 천 개나 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하늘에서 비 내리기만 기다리는 천수답이었으므로 깊고 경사진 골짜기에 수십 개의 층계를 만들어 벼를 심고 흘러내리는 물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오죽하면 ‘천개’라고 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험한 산골을 일구며 살았던 옛...
-
시묘리 네 개 마을에는 모두 각각의 동네계가 따로 결성되어 있다. 이중에 부수골의 동네계에서는 계장을 이장과는 별도로 새로 뽑는데, 임기가 3년이다. 이장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동계장은 주민들의 애경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동계 모임이 있는 날이면 마을을 떠나 서울에 사는 사람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참석한다. 특히 동네...
-
해송공예의 대표 문재필 씨는 맨손으로 시작해 목칠공예의 일가를 일궈낸 인물이다. 차분한 목소리와 곧은 자세의 외모는 빈틈없어 보이면서 충청도 사람 특유의 인정미가 넘친다. 문재필 씨는 논산시 성동면 삼산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동면 일대는 석성천과 논산천 그리고 금강이 삼면을 둘러싼 넓은 평지로 호남평야의 시작이 되는 논산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
논산시에서는 딸기를 특화시켜 농장주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중 새로운 재배방식인 수경재배가 주목받으며 매년 몇 군데 농장을 선정에 보조금을 지급해 수경재배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06년 신청자 가운데 뽑힌 5개의 농장은 딸기재배 경력이 있고 농장 상황이 가능한 곳들이었다. 당시 시묘리에서는 2개의 농장에서 지원을 받아 수경재배를 시작하게...
-
시묘리라는 지명은 효자가 부모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시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묘를 지킨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효심이 깊은 자식은 부모님의 묘를 지키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생업을 포기하고 묘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든 일일 뿐더러 시묘살이는 개인의 모든...
-
부수골 은 시묘3리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다. 4개의 행정리에 속한 여러 자연마을 중에 가장 안온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신사산의 산줄기가 마을의 양쪽을 감싸 안은 것 같은 형국이다. 도로변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부수골을 둘러싼 낮은 야산은 정식 행정지명이...
-
불 타버린 창고는 마음에서 지우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을 헤매었다. 그때 시묘리를 찾게 되었는데 넓은 평지에 적당히 솟은 산줄기와 나지막한 언덕, 효자가 살았다는 ‘시묘’라는 동네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고속도로와 가까운 것도 좋아 시묘1리 골짜기 안쪽에 공장을 짓고 새 출발을 했다. 1997년 말 준공 신고를 하기 위해 시청에 갔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IMF 구제금융 받게...
-
딸기 농사를 하는 사람들은 1년 내내 농번기이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벼농사는 한여름과 겨울이면 쉴 수가 있지만 딸기는 1년 365일 매일 손이 가는 식물이다. 묘를 만들어 심고 온도 조절을 해주는 과정에서 하루라도 못 본 척 하면 한해 농사를 망친다. 수확할 때는 하나의 줄기에서 2~3일에 한번씩 열매를 맺으니 이르면 12월부터 늦으면 6월까지 매일매일 딸기를 따서 팔아야 한다...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있던 조선 후기의 다리.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시진교는 시진포에 있는 다리로 은진현 북쪽 13리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료에 시진포는 은진현의 북쪽 10리 거리라 하므로 포구의 입구와 다리까지 3리, 즉 1.2㎞ 정도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진포의 위치는 은진현의 고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는데 『동여도(東輿圖)』,...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에 있는 사설 교육기관. 양지서당은 도덕윤리, 인의예지, 효제충신, 인성예절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한문, 서예, 검도 등을 교육함과 동시에 우리의 전통 문화와 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청소년의 정신 교육에 선구자 역할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에 양지서당을 개원하였다. 2002년 7월 논산시 연산면 송...
-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딸기는 키가 20㎝ 정도 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작고 흔해보여도 예민하기가 인삼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다. 딸기농가에서 농장 체험행사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딸기의 예민한 성질 때문이다. 딸기가 견디는 기온이 5도에서 25도까지라 냉해에는 강한 편이지만, 잎과 줄기를 건드리면 스트레스를 받고 눈에 띌 정도로 성장이 더뎌진다. 딸기 체험...
-
옛날 시묘골과 황골 등지에서는 ‘고려장’ 또는 ‘고린장’이라 부르는 옛 사람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산속에 나무가 우거져 찾아 볼 수도 없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도 없지만,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을 앉혀놓고 고려장 지낸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내 들려주곤 하였다. 언뜻 돌로 만든 무덤 같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의 무덤이...
-
충청남도 논산 출신의 학자 윤증이 그려진 조선 후기 초상화 5점과 문서. 윤증 초상 일괄은 조선 중기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었던 문신 윤증(尹拯)을 그린 초상화 5점과 『영당기적(影堂紀蹟)』 1점을 말한다. 윤증 집안에서 관리하던 윤증 초상 일괄은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그 곳에...
-
최병권 씨 부부는 1970년대부터 딸기재배를 해 왔고, 남들이 실패하고 쓰러질 때에도 꿋꿋하게 버텨왔으므로 수경재배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100%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화려한 성공사례 뿐만 아니라 망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려왔기 때문이다. 또한 최병권 씨 부부는 지연농장의 기존 시설을 없애고 새로 하우스를 꾸며본 결과 여덟 고랑이 여섯 고랑으로 줄어들었다. 잘못하다가...
-
최재현 씨가 사업에 실패하고서 돌아온 고향에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였지만, 그때까지 직접 땅을 파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지라 바로 논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침 들려오는 소문은 채운면 용화리에서 시작된 딸기농사가 수익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당장 채운면의 딸기밭을 찾아가 농사법을 살펴본 후 딸기 묘를 받아와 시묘골에 재배를 시작했다...
-
날이 갈수록 보다 가치 있는 여가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국 각지에는 다양한 문화 공간이 마련되고 있다. 특히 어린이를 둔 가정에서는 어른 아이가 함께 재미와 교육적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체험을 선호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시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묘리는 생태, 문화, 공연, 스포츠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체...
-
시묘4리에서 시묘3리로 가는 길가에 ‘해송공예(海松工藝)’ 입간판이 있다. 간판을 따라 좁은 길목으로 들어가면 언덕배기 입구에서 키 큰 소나무들이 반겨주고 곧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는데 한구석에 주황색 이층 벽돌집이 눈에 띈다. 이곳에 해송공예의 공예품 전시실과 체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해송공예는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전통 목칠공예 업체로 충청남도는 물론이고...
-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