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존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1392
한자 趙存性
영어공식명칭 Jo Jonseong
이칭/별칭 수초(守初),용호(龍湖),정곡(鼎谷),소민(昭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4년연표보기 - 조존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조존성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조존성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조존성 검열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조존성 예문관봉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22년 - 조존성 해운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조존성 지의금부사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조존성 사망
묘소|단소 조존성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양주(楊州)
대표 관직 강원도관찰사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조존성(趙存性)[1554~1628]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수초(守初), 호는 정곡(鼎谷)·용호(龍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무강(趙無彊)이고, 할아버지는 조연손(趙連孫)이다. 아버지는 조람(趙擥)이고, 어머니는 이몽규(李夢奎)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부인은 강원도사 이신충(李藎忠)의 딸 용인 이씨(龍仁 李氏)이며, 아들은 조종원(趙宗遠)·조창원(趙昌遠)·조계원(趙啓遠)이다.

[활동 사항]

조존성은 1554년(명종 9)에 태어나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하여 검열에 제수되었다. 1591년 대교로 승진하였으나 정치적 분쟁에 얽혀 연좌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호서 지방에 머무르다가 1593년 행재소(行在所)에 상소하여 대교에 복직하고 곧이어 예문관봉교가 되었다. 이후 전적·예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낸 뒤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명(明)에 파견되었다.

조존성임진왜란 시기 세곡(稅穀)의 운송과 관련된 직임을 여러 차례 수행하였다. 호조정랑으로 있을 때 호남의 조운을 감독하였고, 직무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해운판관에 천거되었다. 이어서 명나라에서 운송하는 군량미를 감독하는 어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봉상시첨정·내자시정을 거쳐 강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파직되었다. 이후 충주목사·서산군수 등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장악원정과 사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교정에 참여하였다.

조존성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에서 쫓겨나 호서로 돌아갔고, 1621년 사면되어 광해군 대에 일시적으로 새로 만들어졌던 해운사(海運使)를 지내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동지의금부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검찰사로서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귀경 후에는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강원도관찰사·지돈녕부사로 역임한 뒤 1628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존성의 저술로는 문집인 『용호유집(龍湖遺集)』이 전한다.

[묘소]

조존성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의 양주 조씨 묘역에 있으며, 부인 용인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

조존성은 1630년 소민(昭敏)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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