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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기자들의 친목 단체. 대구기자구락부(大邱記者俱樂部)는 1922년 8월 요정 춘대화(春大和)에서 조선인 측 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 대구지국에서 각 1인과 일본인 측 경성일일신문, 조선매일신문, 부산일보, 마관일일신문(馬關日日新聞), 방장(防長), 경북평론(慶北評論) 등 6개 언론사에서 각 1인 등 총 9명이 모여 상호 협의한 결과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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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과 함께 대구에서 발행된 일간지. 일제강점기 말 대구에 본사를 둔 일본어 일간지 『대구일일신문(大邱日日新聞)』, 『대구일보(大邱日報)』, 『조선민보(朝鮮民報)』가 지역신문으로 발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물자 부족을 이유로 ‘일도일지(一道一紙)’의 언론 정책을 강요함에 따라 『조선민보』와 『대구일보』가 『대구일일신문』으로 통합되었다.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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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와 경북 각 지역 조선어 신문지국과 조선인 기자들이 상호 연락과 협조를 위하여 결성한 기자 단체. 1930년대 들어 대구·경북 지역의 사회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동시에 조선의 사회운동 노선이 비합법운동으로 전환되어 가면서 사회적 관심 사항을 일반에 알리기가 수월치 않게 되었다. 이에 대구·경북 각 지역 신문지국과 지국 기자들이 보도의 협조를 꾀하면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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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송기찬(宋箕贊)[1899~?]은 1899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식민지 시대 사회문제를 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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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송기찬(宋箕贊)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후반 20살이 되기 전에 중국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 귀국길에 올랐다. 1920년 2월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 습격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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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있는 민간 신문사. 영남일보는 1945년 대구에서 민족지를 표방하며 설립된 민간 신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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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이선장(李善長)[1903~1985]는 1903년 10월 12일 지금이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에서 태어났다. 신간회 대구지회에 가입하고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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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이우백[1902~?]은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였고, 이후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백산(栢山)이고, 부인은 이경분(李敬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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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언론인. 송기찬(宋箕贊)[1899?~?]은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송정덕(宋貞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학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스스로 밝혔듯이 초등학교도 4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외 독립운동, 언론·사회 운동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한 송기찬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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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대구경찰서 이치가와 순사의 조선인 상해 사건을 보도한 장인환이 일제 관헌에게 탄압받은 사건. 장인환 필화사건은 대구경찰서 이치가와[市川] 순사의 민간인에 대한 상해 사건이 발단되었다. 그 과정을 보면 대구경찰서 소속의 이치가와 순사가 1931년 6월 10일 오전 1시 무렵 대구 서성정 1정목[현재 서성로1가]에서 청각장애자 최봉조(崔鳳祚)를 보고 행동이 수상하다며 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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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한응렬(韓應烈)[?~1949]은 평양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하였다. 1933년 10월 26일 서북 출신들이 조직한 서우구락부(西友俱樂部)에 참가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3년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 기자로 활동하며 조선인 기자들의 친목을 위하여 조직된 칠조회(七鳥會)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