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사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378
한자 湖西士林
영어음역 Hoseo Sarim
영어의미역 Confucian Circles of Hos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정의]

조선 중기 충청도지역의 정치, 사상적 흐름을 주도했던 지성인 집단.

[개설]

사림은 주로 15~16세기에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성리학적 교화와 학문적 심화를 주도했던 핵심세력이었다. 사림은 크게 기호사림과 영남사림으로 분류되어 학맥과 학문 성격이 비교되었고, 아직도 호서사림의 특성이 온전하게 정리되지 못한 아쉬움이 많다. 호서사림은 특히 호란이후 산림인사들의 초치와 북벌론의 강조, 예학의 발달 등으로 정치·사상적 특성을 보였다.

[호서사림의 사상특성]

호서사림의 연원은 역시 연산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학통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학통적 계보는 물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이의 적통을 계승한 김장생~김집의 학문적 특성은 예학이었다. 특히 양란 후의 사회질서 혼란은 예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들 호서사림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인조 이후의 일이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숭용산림(崇用山林)’의 기치 아래 산림을 등용하게 되자 金長生~金集의 학맥을 계승한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 권시, 유계 등 호서산림 인사들은 호서지역을 중심으로 특색있는 학문활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후 호서사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청주지역 사림의 연원]

호서사림의 인맥은 충청도의 커다란 행정 거점이었던 청주, 충주, 공주, 홍주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중 특히 청주목의 사림 전통은 이미 고려 말의 사대부를 대표하는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이성계(李成桂)의 개국세력을 견제하다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힌 일, 율곡 이이가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한 것 등에서 보듯 사림기반이 강했다. 특히 중종대 호서지역 사림파 인물로 청주목 지역에서는 강수 박훈(朴薰)[1484~1540], 김정, 한충과 같은 저명사림이 활동한다.

[청주목 지역의 호서사림]

강수 박훈은 현량과에 급제하고 '국기(國器)' 라는 명성을 들었던 인물로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만년을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김정(金淨)[1486~1521]은 1514년 순창군수로 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과 함께 「신씨복위소」를 올려 박원종 등을 추죄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보은에 유배된 인물이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 저명하며 그의 영향력이 청주목에 크게 미쳤다. 한충(韓忠)[1486~1521]은 조광조, 김정과 도의로써 교유하였고 기묘사화로 경남 거제로 유배되었고 김식, 박훈, 이연경, 신잠 등을 천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조식이황(李滉)의 문인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이 만년에 청주에 우거하면서 강학하였고, 서기(徐起)박지화(朴枝華)의 제자인 이득윤(李得胤)[1553~1630]도 주목할 인물이다.

[청주지역 사림의 활동]

율곡의 서원향약은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적 향약으로서는 여씨향약이나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우리나라의 향촌실정에 맞게 만들어 본격 시행한 향약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청주목 지역에서의 호서사림은 이색이이, 그리고 많은 사림의 배출로 활동 기반이 확대되면서 신항서원(1570년) 등 많은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고, 17세기가 되면서는 우암(尤庵) 송시열의 학통을 승계한 수암 권상하(權尙夏)의 활동으로 서인-노론계의 중심거점이 되면서 화양동 서원을 중심으로 더욱 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영조조의 무신란과 청주의 대립상도 이러한 청주목 지역 호서사림의 다양한 발전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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