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촌락문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263
한자 -新羅村落文書-
영어음역 Silla Chollak Munseo
영어의미역 Village Documents of Silla
이칭/별칭 신라장적(新羅帳籍),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우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추정연도(설1) 695년(효소왕 4)연표보기
제작추정연도(설2) 755년(경덕왕 14)연표보기
제작추정연도(설3) 815년(헌덕왕 7)연표보기
제작추정연도(설4) 875년(헌강왕 1)연표보기

[정의]

일본 도오다이사(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2매의 통일신라시대의 문서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발견경위]

1933년 일본 도오다이사(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13매의 경질(經帙) 가운데 파손된 『화엄경론(華嚴經論)』의 포갑(包匣)을 수리할 때 그 내부의 포심(布心)에 덧붙인 휴지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촬영 후 원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진만 볼 수 있다.

[구성과 형태]

가로 약 58㎝, 세로 약 30㎝의 두 매의 문서인데, 각 문서에는 3개의 횡선과 1.5-2㎝ 정도의 일정한 간격의 종선이 정연하게 그어져 있다. 두 매에 모두 62행에 걸쳐 정연한 해서체 글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간 중간에 정정한 곳이 있다. 작성시기는 695(효소왕 4)·755년(경덕왕 14)·815(헌덕왕 7)·875(헌강왕 1) 등의 설이 있으며, 815년(헌덕왕 7) 설이 유력하다.

[내용]

서원경(西原京) 부근의 당현 사해점촌(當縣 沙害漸村), 당현 살하지촌(當縣 薩下知村), 실명촌(失名村), 서원경실명촌(西原京失名村)의 4개 촌락에 대해 촌락의 둘레, 공연(孔烟)과 계연(計烟)의 수, 9등호제에 의한 각 등급의 연(烟)의 수를 비롯해, 연령별·남여별 인구수와 3년 동안의 증감, 우마(牛馬)의 수와 전(田)·답(畓)·마전(麻田)의 면적, 뽕나무와 잣나무 등의 그루 수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사람은 크게 양인과 노비로 나누어 기재되어 있는데, 양인은 정(丁), 조자(助子), 추자(追子), 소자(小子), 제공(除公), 노공(老公)으로 나누어 남여별 숫자를 기재하고 있으며, 노비 또한 양인의 연령층에 맞추어 기재하였다.

[의의와 평가]

4개 촌의 문서가 모두 (1)촌명(村名) (2)촌역(村域) (3)연(烟) (4)구(口) (5)우마(牛馬) (6)토지(土地) (7)수목(樹木) (8)호구의 감소 (9)우마의 감소 (10)수목의 감소 등의 순으로 일정한 기재방식에 의해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 촌락의 경제상황 및 국가의 수취기반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문서의 모든 자료가 촌 단위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에서는 촌을 단위로 모든 조세를 부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구의 동태에 대하여는 연령별, 남녀별로 자세하게 그 변화까지 기록하고 있음에 반하여 토지의 변동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국가의 주된 관심이 토지보다는 주민들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가의 주된 관심이 촌락을 단위로 한 인구의 지배에 있었고, 그 지배의 내용이 노동력의 수취이었다고 여겨진다.

인구와 우마 수목의 변동이 3년 단위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보아 본 문서는 3년마다 재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새로운 문서가 작성됨에 따라 폐기되어 『화엄경(華嚴經)』의 경질의 포갑을 만드는 재료로 재활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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