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724
한자 烈女
영어음역 yeollyeo
영어의미역 virtuous wom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이재학

[정의]

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거나 순절한 여인 또는 자신의 정절(貞節)을 지키다 죽은 여성으로서 그 행실이 국가나 사회적으로 공인된 여인.

[개설]

전통적으로 열녀란 개가(改嫁)할 수 있는데도 개가하지 않은 여인을 의미했으나 시대에 따라 열녀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본 고대 열녀의 행실은 남편 또는 약혼한 남성과의 약속 이행, 훼절 거부, 복수, 종사 등으로 후대 열녀의 모형을 거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열행은 이념적인 행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을 때 행한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에 기초한다고 하겠다.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고려의 열녀는 왜구의 침입과 내란으로 훼절할 위기에 쳐했을 때 그들에게 대항하다 목숨을 버리는 여성이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여성들이 열녀로 등장한다. 이때의 열녀는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 또는 피살된 여인뿐 아니라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도 포함되고 있지만 아직 병사한 남편을 따라 죽는 순절(殉節)은 나타나지 않는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나타난 조선 전기의 열녀는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나 개가하지 않기 위한 신체 훼손 외에 자식 교육, 시부모 공양 등의 열행도 들어가 있어 열녀의 조건이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열녀편」 110편 중 자결 45편, 타살 29편으로 순절이 74편이나 되어 수절 15편 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열행과 여성의 죽음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조선조에 들어와 열(烈)과 정절이 이념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인의 자결과 피살이 급증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왜적으로부터 욕을 피하려다 죽은 여인들이 많았는데 이때 열녀의 수는 같은 시기 효자와 충신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3배나 많다. 특히 정려된 인물 중 신분이 밝혀진 경우, 사대부 여인보다도 하층민으로서 정표된 사람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사대부 여성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정절 규범이 이제 모든 계층으로 확산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는 변고에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병사한 남편을 따라 죽는 이른바 ‘종사(從死)’한 여인들이 많다. 그러나 자결이 아닌 단지 과도한 애착으로 병사한 여인도 열녀로 간주되었으며, 남편 사후 순절하거나 또는 남편의 장례와 제사 일체, 후사 문제를 모두 친히 담당하고 순절한 여성들이 입전되었다. 이후 열녀전은 대부분 순절이나 자결로 귀결되고 있으며, 조정에서도 종사한 여인만을 열녀로 포상하였다.

18세기에는 남편이 죽자 따라 죽은 여인과 외간남자로부터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은 여인들이 열녀로 많이 등장하며 이러한 현상은 다음 시기에도 지속된다. 하지만 19세기는 한 집안에서 대를 잇는 열녀들, 남편이 살았는데 자결하는 여인, 절개를 지킨 기녀(妓女), 남편의 원수를 갚고 순절하는 여인들이 새로이 열녀로 인정되는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정표된 열녀 중 사족(士族)의 비율을 보면, 18세기에는 57%, 19세기에는 87%로 나타난다. 이는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선조의 현양을 위해 후손들이 정표를 많이 청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경제적 변동의 시기 양반신분이 급증하는 신분제의 붕괴현상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열녀의 존재는 타율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며, 열녀로의 입전은 여성들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 공인받는 방법의 하나였다. 이는 또한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유지·강화하려는 것이며, 후대의 여성들에게 귀감으로 삼게 하려는 여성교화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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