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곡 공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365
한자 米穀供出
영어음역 migok gongchul
영어의미역 delivery of ri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양수

[정의]

미군정시기에 실시된 미곡정책.

[개설]

초기 미군정은 쌀의 자유판매를 허용하였다. 즉 미곡의 자유시장을 포함한 자유상품시장의 자본주의 제도를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의 정책에 대조되는 것으로 제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쌀의 매점과 투기, 그리고 과대소비로 이어지면서 쌀값이 폭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46년 2월부터 다시 미곡수집령을 공포하여 강제공출제도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현실성이 없는 낮은 공출가로 인한 경제적인 상태의 악화, 과다한 공출량의 배분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된다. 또한 강제력을 사용한 공출은 농민들의 불만의 근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미군정의 정책은 생존권이 위협받던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상태를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농민들을 식민지 시기와 유사하거나 혹은 더한 경제적 빈곤 상태로 몰아넣었다. 공출이 강화되면서 미군정의 배급정책이 농촌에도 적용되었고, 그 결과 곡물 섭취량은 오히려 식민지 시대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에 다시 식량공출 및 배급제를 실시하자 쌀값은 한없이 폭등하였다. 이러한 미곡경제의 혼란은 인플레와 실업을 만연시키고 생계비를 상승시켰고, 마침내는 1946년 전국적인 10월 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경과]

1947년도 충청북도의 추곡 공출할당량은 21만9000석으로 1947년 10월 말까지 할당량의 23%인 4만5804석이 수집되었고, 청주의 경우는 할당량의 15%인 448석이 수집되었다.

그리고, 식량배급에 있어서 충청북도의 경우, 미곡은 충청북도 생산분을 충청북도에서만 소비하면 자족할 수 있었으나, 다른 도로의 반출이 있는 관계로 전곡(田穀)을 식량배급에 충당하였다. 1947년의 경우 충청북도 전체 비농가 33만4000인에게 1일 2합(合) 3작(勺)의 배급을 실시하였다.

한편, 해운이 불가능하고 산악지대가 많은 충청북도는 물자교역이 쉽지 않아 원활한 물자거래가 되지 않았고, 군청소재지인 지방 소도시에서 5일장이 열려 물자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였다. 그리고 장에서 주로 거래되는 물자는 인근 농촌으로부터 반입된 양곡과 수제품이었다.

도청소재지 청주만 하더라도 소비도시로서 주로 인근 농촌으로부터 집하되는 농작물과 서울, 대구, 부산으로부터 유입되는 일용품의 집산지에 불과하였다. 청주의 물가추이를 보면 양곡시세는 서울의 3할 가량이었으며, 토산인 과일시세도 약간 저렴하였다. 기타 생필품 등은 서울과 거의 같았다.

1945년 12월을 기준으로 하는 물가지수는 1946년 들어 폭등하였는데 곡물가는 5배 이상되었다.

[결과]

원래 이 곡물 강제 공출은 미군정 시기에 군정 당국이 식량 위기로 인한 기층민의 반군정(反軍政) 의식의 고양을 저지하기 위해 1946년 2월 미곡수집령을 발표해 시행한 것이다. 공업 노동자의 저임금 정책 실시를 위해 저미가로 수집되었고,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자 강제 공출을 강행하였고, 수집 과정에서 폭력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 미곡 공출은 전반적인 농업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농민의 반군정운동의 초점이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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