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산 성황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343
한자 唐羡山城隍祭
영어음역 Dangisan Seonghwangje
영어의미역 Village Guardian Festival of Dangisan Mountain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안상경

[정의]

당이산(唐羡山)에서 관행제(官行祭)로 치렀던 성황제.

[연원]

관련 자료를 통해 당이산(唐羡山)에 성황당(城隍堂)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社稷壇在州西 文廟在鄕校 城隍堂在唐羡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淸州牧)」). 그러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성황당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가 건립되면서 단절되었다. 그런데 동자료에서 당이산(唐羡山)에 “토성의 흔적이 있었다(唐羡山在州東一里鎭山有土城基)”는 단초는 애초 당이산(唐羡山)의 성황제가 민간의 산천제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제의였음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황의 ‘성(城)’은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구축한 토성을 말한다. 토성을 쌓기 위해서는 흙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성의 주변에는 움푹 파인 또 다른 방어선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이것을 ‘황(隍)’이라고 한다. 성황은 이처럼 일종의 방어시설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황의 자해적 의미에 충실하듯, 송대 이후에는 성황의 신격이 국가 및 지역의 수호신으로 변모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1055년(문종 9)에 “새로 구축한 성에 성황사(城隍祠)를 설치하고 권위를 존숭한다는 칭호를 내리고 춘추로 치제(致祭)하였다(九年三月壬申 宣德鎭新城 置城隍神祠 賜號崇威 春秋致祭, 『고려사(高麗史)』지17 례 길례소사 잡사)”는 기록이 있다. 성황에게 기탁하여 변방지역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성황은 국가 및 지역의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당시 고려 사회를 바라본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성황은 국가의 운영을 저해하는 요인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이들에 의해 성황제의 폐해 및 폐지가 지적·제기되고, 결국 1437년(세종 19)에 기존의 성황에 내려진 봉호(封號)가 일괄적으로 삭제된다.

이렇게 성황제의 본래 성격이 무마되면서, 조선 중기를 전하여 신라 이래부터 형성되어 민간에서 전승되었던 산천제와 혼효되는 결과를 낳는다.

[변천]

당이산(唐羡山) 성황제는 조선 초기까지 국가 및 지역을 외적으로부터 수호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 분명하며, 조선 중기를 전하여 산천제와 혼효되면서 민간의 기복적인 신앙으로 변모된 듯하다.

한편 민간에서 1914년까지 전승되던 성황제가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지만, 해방이 되면서 전통의 유훈(遺訓)을 계승해야 한다는 지역의 몇몇 고노(告老)에 의해 1946년에 일회적으로 성황제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끝내 성황제를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4.04 본문 내용 수정 1055년(문종 9)에 “새로 구축한 성에 성황사(城隍祠)를 설치하고 춘추로 치제(致祭)하였다(九年三月壬申 宣德鎭新城 置城隍神祠 賜號崇威 春秋致祭, 『고려사(高麗史)』지17 례 길례소사 잡사)” ->1055년(문종 9)에 “새로 구축한 성에 성황사(城隍祠)를 설치하고 권위를 존숭한다는 칭호를 내리고 춘추로 치제(致祭)하였다(九年三月壬申 宣德鎭新城 置城隍神祠 賜號崇威 春秋致祭, 『고려사(高麗史)』지17 례 길례소사 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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