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989
한자 市場
영어음역 sijang
영어의미역 market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임병무

[정의]

상품을 사고 파는 거래장소.

[개설]

재화, 용역이 거래되는 장소로 여기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광의의 개념으로는 금융시장, 석유시장 등 세계 무역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여기서는 시장 개념의 원론적 서술이 아니라 청주지역의 재래시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장의 기능]

시장의 1차적 기능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만나 거래를 하는 행위에 있다. 즉 팔사람(상인)과 살사람(고객)의 흥정으로 상행위가 이루어진다. 양자간에는 흥정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 보편적 행위 속에 가격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공급과잉은 가격의 하락을 불러오며 공급부족은 가격의 상승을 가져온다. 그러나 재래시장의 특징은 재화의 교환 이외에도 축제의 장이며 정보교환의 장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2차적, 3차적 기능은 때에 따라서 1차적 기능을 앞지르는 기묘한 현상을 불러오기도 한다. ‘남이 장에 가면 거름 짊어지고 나선다’라는 속담은 그런 재래시장의 특성과 기능을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5일장에 가면 없는 게 없다. 물화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윗동네 아랫동네 친구를 만나 장국밥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누구네 회갑잔치, 혼인날 등에 대한 정보를 얻고 때로는 시국담론을 벌이기도 한다. 떠돌이 약장수의 입담에 혼을 빼앗기는가 하면 남사당패의 줄타기 구경에 해 가는 줄 모른다. 전통 5일장은 차라리 축제이며 애환과 인정이 숨쉬는 삶의 현장이다.

[변천]

우리나라 시장의 기원은 주화(鑄貨)와 곡폐(穀幣)가 병용된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추정된다. 삼한(三韓)시대에는 촌락간에 형성되는 가로시(街路市), 국가간의 경계시(境界市), 정치의 중심지에 서는 성읍시(城邑市), 자연신을 숭배하는 풍습에 따라 나타났던 제전시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9년, 한성(漢城)에 관설시전(官設市廛)이 설치되어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 동구(洞口)에 이르기까지 좌우행랑 백 여간의 점포가 있어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고 국고의 잉여물을 처분하는 역할을 맡은 육시전으로 발전하여 관영상업의 위풍을 떨쳤다. 경향 각지에도 향시(鄕市)가 정기적으로 개설되어 크게 발전했고 한성 각 시전(市廛)에는 도중(都中)이라는 조합까지 생겨났다.

시장은 매일 열리는 상설시, 읍성 밖에서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저자시, 그리고 5일마다 열리는 5일장이 있다. 향시는 일월육장(一月六場)이라 하여 한 달에 여섯 번, 닷새마다 장이 섰는데 이를 한 파수(派收)라 한다. 전국에는 1천여 개 소의 5일장이 있는데 점차 줄어들고 있다. 5일장은 대개 50리마다 열렸는데 이는 장꾼들의 하루 행동반경을 감안한 조치다. 청주는 상설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저자시와 5일장이 있었다. 구 청주약국에서 조흥은행 앞을 지나 남주동(南洲洞)에 이르는 길을 현지주민들은 아직도 ‘제작거리’라 부르는데 이는 ‘저자거리’의 사투리이다.

청주읍성 청남문(淸南門) 밖에는 상설시장 격인 저자시가 열렸다. 저자시는 아침 인시(寅時)~묘시(卯時)간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섰는데 아침 장이 저녁 장 보다 규모가 컸다. 채소류, 청과류, 잡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거래하였는데 청주 관아에서도 이곳을 통해 물품을 조달하였다. 청주읍성 밖의 저자거리에는 두부전, 떡전, 어물전이 있었고 그 아래 남주동(南洲洞) 쪽으로는 자리전, 목물전, 싸전(미곡시장), 나무전, 옹기전, 포목전이 연이어져 있었다. 그 전보다 쇠락하긴 했으나 남주동(南洲洞) 일대에는 아직도 목물전, 옹기전, 어물전, 포목전 등이 운영되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중앙공원(中央公園) 앞에는 저자시의 흔적인 떡전이 있었는데 얼마 후 모습을 감추었다. 청주의 시장은 대개 무심천(無心川) 남쪽 언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니까 현재의 남주동(南洲洞), 석교동 일대다. 그때의 무심천(無心川)은 현재보다 훨씬 안 쪽(시내 쪽)으로 흘렀다. 1906년에 홍수에 휩쓸려 폐허가 된 청주시장을 재건하였다. 1913년과 1917년에는 시장에 큰불이나 또다시 시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무심천(無心川) 변의 재래시장은 이처럼 물난리와 불난리를 툭하면 겪었고 그 폐허 위에 상인들은 재기의 삽질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현황]

청주시에는 현재 15개의 상설시장(재래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중에서 남주동시장이 역사가 가장 깊고 현재에는 석교동 육거리시장이 청주의 재래시장을 대표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서문시장, 중앙시장, 북부시장이 생겨났으며 도시가 외곽으로 발달함에 따라 운천시장, 사직시장, 복대시장, 사창시장, 내덕자연시장, 복대가경시장, 하복대시장, 가경터미널시장, 수곡시장, 원마루시장 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재래시장의 공통점은 대형할인점이 잇따라 입점하면서 경쟁력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 3월에는 육거리시장에 두 차례 화재가 발생하여 영세상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행정적으로는 청주의 5일장은 폐쇄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2일, 7일 장날이 남주동(南洲洞), 육거리시장에서 어김없이 열린다. 이는 장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을 해오던 내륙 주민의 오래된 습성이고 또 생활문화이기 때문이다. 청주장날이 오면 미원, 오창, 내수 등 청주 인근의 장꾼이 몰리고, 육거리 일대는 인도마저 노점상이 점거할 정도로 일대 혼잡을 빚는다. 청주시에서는 재래시장의 활성화 대책으로 육거리시장에 아케이드 공사를 벌이는 등 행정적 지원을 하고 있으며 자체 상가 번영회에서도 상품권 발행, 편의시설 마련 등 고객유치에 나서고 있으나 대형할인점에 비해 자본력이 취약하고 경쟁력이 약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재래시장과 5일장은 기업화돼가고 있는 시장의 변화에 따라 점차 사양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민초들의 애환과 삶이 투영돼 있기 때문에 쇠퇴일로일 망정 우리의 호흡은 아직도 그곳에서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재래시장의 본래 기능은 물화의 거래에 있는 것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동네간의 정보교환이라는 부수적 기능 또한 컸다. 이런 의미에서 장날과 재래시장은 커뮤니케이션의 장이요, 너와 내가 만나 삶의 진국을 털어놓는 나눔의 장이었다. 따라서 시장은 거래의 장이요, 대화의 장이며 더 나아가 축제의 장이었다. 농촌주민들에게 장은 생활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청주는 바다가 없는 내륙도여서 쇠전, 미곡시장, 약전, 목물전 등이 발달했다. 개화기 이전,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소금이나 비린 자반은 금강 소금 배의 종착지인 부강 개펄 장(구들기 장터)에서 우마차, 또는 지게에 의해 운반되었고 경부선이 나면서부터는 물량공급지가 연기군 조치원으로 바뀌었다.

청석학원을 세운 고 김원근(金元根)[1886~1965], 김영근 형제는 어물도가로 많은 돈을 벌어 학원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신흥학원 설립자 고 민철기도 특이한 장사 수완을 보여 거부가 됐다.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강점시대에 민족자본을 형성하여 민족혼을 일깨운 무대가 바로 청주의 재래시장이며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에 항거한 것도 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재래시장을 단순히 물화 교환의 공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다.

이처럼 전통시장의 의미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재화의 구입, 판매와 더불어 그 지역성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오늘날 전국의 재래시장은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는 아직도 한국인의 향수와 정서가 살아 숨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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