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주
-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촌. 「신라촌락문서」에는 4개의 촌명이 보이는데 그 중 그 이름이 확실한 것은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둘 뿐이다. 사해점촌의 마을의 규모는 둘레 5,725보(步)이고, 호구수는 11호(戶)에 147명이다. 가축으로는 말이 25마리, 소가 22마리이고, 논은 102결(結) 2부(負) 4속(束), 밭(田)은...
-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촌. 「신라촌락문서」에는 4개의 촌명이 보이는데 그 중 그 이름이 확실한 것은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둘 뿐이다. 살하지촌의 마을의 규모는 둘레 12,830보(步)로 4개 마을 중에 가장 크다. 호(戶)는 15호에 인구는 125명이고, 논은 63결 64부 9속, 밭은 119결 5부 8속이다. 가축으로는...
-
태봉~고려 초의 무신. 일찍이 궁예(弓裔)를 섬겨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얻음으로써 무관에 등용되었다. 궁예 말년에 이르러 웅주(熊州)를 습격해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그 수하의 병사들이 대부분이 도망해 버리게 되어 웅주는 다시 후백...
-
청주(淸州) 속현(屬縣)의 하나. 백제 때 구지현(仇知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금지현(金池縣)으로 고쳐 불렀으며, 웅주(熊州) 대록군(大麓郡)[충청북도 천안시 목천면]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전의현으로 고쳐 청주(淸州)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1395년(태조 4) 처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연기(燕岐)를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