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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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붙이와 돌에 새긴 살아있는 역사기록이며 선조들의 삶과 사건의 생생한 증거 금석문은 크게 금문과 석문으로 나누어진다. 금문은 금속류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경감·조상·범종·도량형 등에 주출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며, 석문은 석재의 비·묘지·조상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금문의 대표적인 경우는 「칠지도명」·「환두대도명」·「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광배문」·「상원사종명」·「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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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청주지역의 의병장·충신.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시응(時應)이며, 호는 매은당(梅隱堂)이다. 교리공(校理公) 박인년(朴引年)의 후손으로 흥덕구 강서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1544~1592],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와 함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1544~1611]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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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임란의병 박춘번(朴春蕃)의 형이다.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1544~1592]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 그 해 7월 4일 청주 복태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종사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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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의 깨달음에 연원한다. 전통적으로 그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緣起)로 알려져 있다. 일체는 원인과 조건의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영원 불변한 독립적 실체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기존의 종교·철학에 대한 혁명적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후에도 불교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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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事蹟)을 기념하기위해 세우는 돌. 비(碑)는 보통 비석 혹은 석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석비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석비는 묘비와 탑비·능묘비 외에도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의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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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충청북도 청주시의 역사. 선사시대의 청주지역이 어떠한 문화양상을 보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지금까지 학술조사를 거친 곳이나 지표상의 채집된 유물을 통해 알려진 선사유적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청주시의 중앙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무심천(無心川)과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美湖川) 주변은 대단히 완만한 구릉성 산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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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장.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기허당(騎虛堂)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충청남도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할 때 선장(禪杖: 승려의 지팡이)으로 무예를 익혔는데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출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규대사(靈圭大師)[?~1592]는 승려들의 창의(倡義)를 독려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영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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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공적을 기리는 전적비. 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청주성 전투에서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전적비(戰蹟碑)이다. 청주시 내 중앙공원(中央公園) 동쪽 출입구 오른쪽 화단에 조헌(趙憲)[1544~1592]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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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도를 닦는 학자. 청주에서는 1570년(선조 3)에 신항서원이 호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질 정도로 사림들이 자리잡혀 갔고 임진왜란 때 청주읍성의 수복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유림(儒林)은 유학의 도(道)를 닦는 학자로써 흔히, 사림(士林)을 일컫는다. 사림이란 용어는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의 시기에도 간혹 쓰였으나, 중종조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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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유학자, 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이며, 호는 중봉(重峰)·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경기도 김포 출생이다. 조응지(趙應祉)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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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의 비석.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戰蹟碑)로 그가 죽은지 약 120년 뒤인 1710년(숙종 36)에 세워졌다. 상당구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옮겨, 현재는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서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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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청주의 정치, 행정, 군사,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의 석축읍성. 조선시대 축조된 청주읍성은 청주시의 최고 최대의 역사유적지이다. 청주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흔적을 시내 중심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청주읍성은 청주의 보금자리요 청주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다. 청주읍성은 읍성의 나라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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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조헌(趙憲)[1544~1592]의 의병,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승병,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청주 의병 등이 합군하여 왜군에게 함락 되었던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옥천에서 일으킨 조헌의 의병과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승병 그리고 박춘무의 청주 의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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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 왜군에게 빼앗긴 청주성을 되찾은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문화예술축제. 임진왜란 시,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던 청주성 전투는 기허당 영규대사(靈圭大師)[?~1592], 중봉 조헌(趙憲)[1544~1592]장군, 화천당 박춘무(朴春茂)[1544~1611] 장군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임진왜란 육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전이다. 이 전투는 정규군이 강력한 왜군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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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의 서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서문동 96번지에 있는 청주읍성 서문터는 서문동 오거리에서 성안길로 통하는 속칭 족발골목의 입구에 있다. 이곳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이 있었던 곳이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 개정사업으로 헐리었다. 서문의 안에는 충청병영이 있었고 문밖에는 대교천 즉 지금의 무심천(無心川)이 흘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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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忠淸北道) 청주시(淸州市) 상당구(上堂區) 남문로2가(南門路2街)에 있는 면적 24,800평 규모의 공원.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無心川)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 2가에 서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은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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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청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 도읍한 이후에 많은 사람이 주거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에서 낙향하거나, 선조의 묘지를 쓰고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충효를 강조하여, 충청지역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조선 이후에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청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은 사람은 드물고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