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동 동양촌 - 전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99
한자 -東陽村-
이칭/별칭 산양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부모산 전설]

문헌에 기재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부모산은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등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朴春茂)[1544~1611]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자 그 안에 갇힌 의병들은 보름이 지나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때 의병장 박춘무의 꿈속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소나무를 가리키며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박춘무는 꿈에서 깨어나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를 뽑자 식수는 물론 말에게 목욕을 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물이 솟아났다. 이것을 알게 된 왜병들이 물러났고 이때부터 군사를 먹여 살린 산이라 해서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때 군사들이 먹었던 우물을 모유정(母乳井)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조사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부모산, 애양산으로 내용으로다 얘기했다는 것은 이 근래 임진왜란 이야기를 하는데 임진왜란 때가 아닌 거 같애. 부모산, 나는 이것이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에 삼한시대 전, 그 이전부터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은 이 성이 북쪽에 오미강, 미호천(美湖川), 이걸로 저 짝에서 내려오는 것도 막구, 마한 때부터 부족국가가 아니었나 해요.

지금 충북대학교에 가면 화살촉이 있다고 그래요. 비하 모랭이에서 주웠다고. 부모산에 가면 그전에 기와, 지금 같은 기와가 아니고, 엉글은 삼벼 다식박 듯 찍어놓은 것이 보인다구. 엉글은 돌로 해서 찍어낸….

요기가 능모랭이요. 능모랭이 하면은, 임금의 묘를 말하는 거 아뇨? 그럼 어떻게 해서 언제부터 능모랭이라고 했느냐. 그라고 이제 일산봉이라고 한다고, 일산(日傘)은 이제 임금님이 가실 때 이렇게 하는 일산봉. 이게 언제부터 했는지 세조 때 인제 보은으로 해서 갔는데 왜 여기에 능이 있는지….

또 하나는, 그래 왜침(倭侵)이 있어 지나가는데, 그래서 전부 부모산으로 피난을 갔다는 거여, 피난을 갔는데 한 삼백 채가 거 숨어살고 있는데, 적군이 이제 지나가는데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거여. 무사했다. 그냥 지나가서 무사했다. 그런데 물이 있시야 사는 거잖아. 그런데 샘이 있는데 며칠 만에 물이 뚤펴(뚫려)가지고, 그래 물이 퐁퐁 솟아서 먹고살았어. 그건 물줄기가 오미강에서 올라왔다고, 물이 있는데 보면 떠보면 맑았댜. 그래서 부모산이여.

꼭대기에 물이 떨어지질 안 해고 꼭대기에 가운데 물이 있어. 그래 그것이 거기서 피난도 하고 전장도 하고 성이 있거든. 그래 갇혀 가지고 있는데 식량이 떨어지고 물이 떨어지고 없단 말이여. 그냥 죽게 됐는데 거기서 물이 저절로 풍 솟아 가지고 부모보다 낫다고 해서 부모산이고 유래가 됐잖여.

여긴 왜정 때에도, 부모산 하에는 인명재해가 별로 없었어. 보도연맹으로 이짝 저짝 다니며 많이 죽었는데, 여기는 다행으로다 죽은 사람이 없었구, 6.25때. 그리고 천연적으로 피해가 없어요. 우박이 많이 와서 담배가 피해가 났다느니, 어디는 눈이 많이 와서 짐승이 절단 났다, 농사가 절단 났다 하는디, 부모산 여기는 그런 피해가 적어요. 여기 사람들을 피해가, 그래 부모산 덕을 많이 본다고 했어요. 하여간 여기는 우박은 별로 못 봤어. 우리가 나이 팔십을 넘게 살았어도 하여간 우박은 피해를 안 봤어. 다른데 마냥 폭우로 쏟아지는 거는 절대 없어.

[정보제공]

  • •  박영순(남, 1928년생,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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