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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14
한자 -淸州-鎭山-牛岩山
영어의미역 Uamsan Mountain, guardian of Cheongju with power and loyalty like ox
이칭/별칭 와우산,우산,당이산,대모산,모암산,장암산,목암산,목은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높이 338m

[정의]

충북 청주시 상당구 동편에 위치하는 청주의 진산이며 문화유적의 보고.

[개관]

청주시의 동편에 위치하는 우암산(牛岩山)[338m]은 청주의 진산(鎭山)으로 청주시의 명암동, 내덕동, 우암동, 수동, 대성동, 문화동, 용암동에 걸쳐 있고 그 지맥이 탑동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해발 338m의 정상을 중심으로 남과 북 3좌의 연봉과 중앙초등학교 동쪽의 당산(唐山)에까지 이르고 있는 산이다.

청주시의 배경이 되는 우암산(牛岩山)[338m]은 상령산(上嶺山)에서 분기된 것이면서도 상령산과의 중간에 속칭 ‘바람매기고개’라 불리는 낮은 안부를 사이에 두고 있어 독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침엽수와 활엽수로 혼합된 산림을 형성하고 있어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우암산(牛岩山)[338m]에는 청주의 역사를 밝혀주는 옛 유적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 청주지역 방어의 기점이 되었던 산성의 유구가 있고, 용암사에는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이, 목암사에는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한입상이 있으며, 그 외에 용암사, 보현사, 관음사, 광덕사, 문수암, 용화사대한불교수도원 등의 많은 사찰들이 위치하고 있다.

사시사철 청주시민들에게 맑은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문화생활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우암산(牛岩山)[338m]에는 3·1공원, 우암정이라 불리는 국궁장, 국립청주박물관우암어린이회관, 명암약수터 등이 순환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청주시민의 여가활동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휴식공간 제공 및 역사의식 함양에 기여를 하고 있다.

[우암산에 대한 문헌기록]

우암산(牛岩山)[338m]은 본래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렸던 산이다. 와우산(臥牛山)의 명칭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조선시대 지리지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의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우산(牛山)’이라 약칭되기도 하였다. 와우산(臥牛山)이라는 산 이름은 산의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속설이 일반적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소를 불교와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는 당이산(唐羡山)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한 우암산(牛岩山)[338m]은 대모산(大母山), 모암산(母岩山), 장암산(壯岩山), 목암산(牧岩山), 목은산(牧隱山) 등의 지명들로도 전하고 있다. 우암산(牛岩山)[338m]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우암동이 본래 청주군 북주내면(北州內面) 외덕리(外德里)였다가 1935년에 청주읍에 편입되면서 와우산(臥牛山)과 용암사(龍岩寺)의 이름을 따서 우암동으로 개칭되었으므로 대략 이때부터 우암산(牛岩山)[338m]으로 불려진 듯 하다는 설이 있으나, 용암사의 창건이 1945년이므로 이 설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소가 누워 있는 산의 모습과 바위가 많은 데서 우암산(牛岩山)[338m]의 지명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역사적 관련사항]

자연이 청주에 준 천혜의 환경은 무심천(無心川)우암산(牛岩山)[338m]이다. 청주시의 중심에 무심천(無心川)이 관통하고 동쪽의 우암산(牛岩山)[338m]은 청주의 진산으로 오랜 세월 자리하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청주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무심천(無心川)을 젖줄로 삼고, 우암산(牛岩山)[338m]을 든든한 울타리로 삼아 의지하면서 정착하고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하였던 청주는 상당현(上黨縣)이라는 지명으로 문헌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우암산(牛岩山)[338m]은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의 치지, 또는 통일신명 때의 서원소경(西原小京)의 서원경성(西原京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또 우암산(牛岩山)[338m] 주변지역에서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며, 산 정상부와 능선을 감싸고 설축된 산성이 남아 있고, 여러 계곡의 곳곳에 현존 사찰과 옛 절터가 발견되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향교가 우암산(牛岩山)[338m]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한 신사(神社)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우암산(牛岩山)[338m] 기슭 곳곳에서는 민속신상 행위가 지금도 끊임없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처럼 청주지역의 옛 역사와 문화의 변천사를 밝힐 수 있는 문화유적의 보고인 우암산(牛岩山)[338m]의 옛 모습과 의미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우암산(牛岩山)[338m]은 청주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인류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이 집중 분포되어 있다. 용담동에서 출토된 마제석기와 무문토기 산포지 유적은 이곳이 선사인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청주의 서쪽 구릉지대인 신봉동 일대에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고분들이 있는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둘째, 백제 상당현의 치소로서 우암산(牛岩山)[338m]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우암산성의 축조시기가 통일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685)에 서원소경이 설치된 이후라 하더라도 그 이전부터 상당현의 치소가 우암산(牛岩山)[338m] 안에 있었거나 우암산(牛岩山)[338m]에 의지하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우암산(牛岩山)[338m] 곳곳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의 유물로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우암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대략 신라 신문왕 9년(689)경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년(919)의 기록에 보이는 청주성과 동왕 13년(930)에 축조한 청주나성(淸州羅城)이 우암산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암산(牛岩山)[338m]의 남쪽 끝에 독립된 형태로 설축되었다가 나성으로 인하여 우암산성과 연결된 당산토성은 본래 낮은 산봉우리를 감싸고 판축한 삼국시대 이른 시기의 토성으로 보인다.

넷째, 우암산(牛岩山)[338m]에는 종교 또는 신앙과 관련된 유적이 매우 많다. 우암산(牛岩山)[338m]의 사방으로 통하는 계곡마다 거의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절터들이 있어, 지금까지 대략 20여 곳의 절터가 확인 조사되었으며, 근래에 신축된 사찰들도 대부분 옛 절터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또한 조선시대에 지방마다 설치되었던 문묘(文廟) 즉 향교(鄕校),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성황당(城隍堂) 가운데 관아(官衙)를 중심으로 동쪽에 설치되는 문묘와 성황당이 관례에 따라 청주 고을의 동쪽인 우암산(牛岩山)[338m]에 세워져 있었다. 현재 청주향교의 문묘는 잘 남아 있으나, 성황당은 일제강점기 초인 1914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동학농민전쟁 때 순직한 관군을 위하여 모충단(慕忠壇)을 세웠다가 1923년에 모충사(慕忠祠)를 지금의 청주시 모충동으로 옮기고 성황당 터에는 일본인들의 신사를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우암산(牛岩山)[338m]은 청주지역에서 선사시대 이래 농경생활과 지방행정,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지방문화의 흥성과 발전 및 흐름, 때로는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우암산성(牛岩山城)]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산세를 갖는 우암산(牛岩山)[338m]은 서쪽으로 청주 도심과의 연결이 쉬운 반면, 동쪽은 배후로서 산록이 급경사를 이루어 접근이 용이하지 못하고, 보다 동쪽으로는 해발 490m에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있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미호천(美湖川)과 지류인 무심천(無心川), 율량천이 흐르며, 남쪽으로는 금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여건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우암산(牛岩山)[338m]에 서남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중앙에 길게 형성된 계곡을 둘러싸듯 포위한 포곡식(包谷式)산성이 있다. 산성의 전체 남북 길이가 1.8㎞의 범위에 걸치며, 청주의 도심을 향하여 저곡(底谷)을 이룬 나성구조(羅城構造)의 내탁외축(內托外築)으로 내성의 전체둘레는 약 2,997m이고, 외성까지는 약 4㎞가 되며, 내성의 동쪽 능선은 계속 서남향하여 당이산(唐羡山)에 이어져 당이산(唐羡山) 정상의 퇴뫼식 산성인 당산토성과 연결되고 있다. 문지는 북문지·서문지·동문지가 확인되며, 수구쪽에 주문인 남문지가 보이며, 서벽과 북벽에 3~4개소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의 내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고, 수원이 풍부하다.

나성(羅城)은 우리나라에서 발전시킨 독특한 성곽제도(城郭制度)로써 전시에 빠르게 산성으로 이동하여 지형·지세의 유리한 점을 최대한 살려 방어하는 전통적인 방어전술(防禦戰術)에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나성의 형태는 일찍이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나 백제의 사비도성 등 6세기 후반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된 형태의 것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장성을 쌓지 않고 주변의 산성을 나성으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이와 비교하여 우암산성은 평지의 읍성과 연결되는 나성구조를 보이고 있음은 주변의 석축산성과 큰 차이일 수 있고, 배후의 산성으로 청주 상당산성이 있어 주목된다. 이것은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우암산의 불교유적]

불교문화가 융성하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불교의 영향은 청주지역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청주의 진산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면서, 산세가 좋고, 방어적으로도 유리한 우암산(牛岩山)[338m] 일대에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많은 사찰들이 들어섰고, 이와 관련한 유물·유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용암사는 청주시 우암동청주대학교 구내 사범대학 건물 뒤에 있는 작은 절로 1945년에 창건되었는데, 이곳은 본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절터였다. 현재 이 절의 경내의 대웅전과 살림집 사이에 남향하여 노천에 모셔져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청주의 대표적인 석불이다. 좌대를 모두 갖추고 남향한 비로자나불은 광배는 유실된 상태로 나발의 정수리에 낮고 넓적한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돌려져 있다. 수인은 지권인이고 법의는 좌우 통견으로 처리하였고, 옷주름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실적인 표현기법에서 신라의 조각수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상의 앞에 장방형의 배례석이 놓여져 있으며 불상과 대좌·배례석 모두 나말려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우암산(牛岩山)[338m] 서쪽 중턱의 청주시내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한 관음사는 1943년에 세워진 절이지만 이곳에서 「계향지사(桂香之寺)」, 「월고사(月姑寺)」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이곳 관음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철확(鐵鑊)이 있다. 이 가마솥은 1958년에 발견되어 절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부식으로 심하게 파손되자 지금은 어디엔가 숨겨두었는지 폐기시켰는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반구형에 구연부를 밖으로 둥글게 말아서 처리한, 이 철확은 보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나, 충남 논산의 개태사(開泰寺)에 있는 가마솥보다는 작으나 이곳 절터의 규모에 비하면 대단히 큰 것이다.

우암산(牛岩山)[338m]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수도원의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며, 그 이전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큰 사찰이 있었던 듯, 수도원 주변에서 많은 기와편들과 석조물들이 흩어져있다. 사찰의 남동쪽 계곡 건너편에 산재하던 석재들은 하대석을 제외하고 모두 경내의 대웅전 앞으로 옮겨 대좌 형태로 복원하여 놓았으나 지대석 등이 결실되어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각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세련된 조각기법이 보여 이 대석에 안치되었던 불상의 모습은 현재 찾을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위엄이 있고 안정된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암산(牛岩山)[338m] 남쪽 골짜기를 오르는 초입에 위치한 목암사는 1950년에 세워진 것이나 맞은편에 평지를 이룬 1천평 정도의 밭은 조선후기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목우사의 옛터로, 우암산(牛岩山)[338m]의 많은 절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헌기록을 갖고 있다. 목우사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지인『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한『호서읍지(湖西邑誌)』·『청주읍지(淸州邑誌)』 등에 목우암(牧牛菴)이 와우산(臥牛山)에 있다고 하였으며,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고을 동쪽으로 5리 지점의 와우산(臥牛山)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목우암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여지도서(輿地圖書)』의 「청주목 방리조」에는 ‘목암(牧菴)’이 청주관문에서 북쪽으로 7리에 있는데 편호는 8호로 남자 13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방향과 거리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목우사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밖에『여지도서(輿地圖書)』에 수록된「청주목지도」와 전남 구례군 운조루에 소장된『여지도(輿地圖)』의 중요한 일부로 포함되어 있는「청주읍성도」 및 「서원지도(西原地圖)」에 와우산(臥牛山)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목우암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1890년경에 간행된『청주군읍지(淸州郡邑誌)』에 나타나고 있는 목우암이, 1923년에 간행된『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에 “옛날에는 목우암이라고 부르는 한 채의 불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한 조각의 초석도 남아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구한말의 격변기 내지는 일제강점기 초기 무렵에 폐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암산(牛岩山)[338m] 정상의 남쪽 계곡의 청주방송 송신소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약 1천평의 대지에 있는 절터이다. 1980년의 지표조사에서 발견된「흥천(興泉)」명 기와편을 통하여 이 절터가 고려시대에 있었던 ‘흥천사’의 터였음이 밝혀졌다. 이 절터에서 발견된 동종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소종(小鐘)으로서 각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이 우수하고 형태가 아름다워서 이미 학계에 수차 소개된 바 있다. 대략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우암산(牛岩山)[338m]의 서쪽 계곡의 보현사 길과 그 남쪽에 있는 관음사 길의 중간쯤의 계곡에 있는 절터로, 1980년 여름 장마로 계곡에 있던 부도가 노출되었다. 그 후 부도는 1992년에 청주대학교 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부도는 지대석과 기단 및 탑신이 한 개의 돌로 조각된 석탑 모양의 방형부도로서 개석과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현재의 옥개석은 본래 제짝이 아니다. 조성형태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우암산의 민속]

우암산(牛岩山)[338m]은 불교문화가 꽃피우기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아왔던 곳이다. 산에 사람이 정착하면서부터 그 산은 역사와 문화를 가지게 된다. 우암산(牛岩山)[338m]은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부터 현재의 청주시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향유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이 모이고,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는 항상 전설과 민속신앙이 나타나게 된다.

우암산(牛岩山)[338m]은 오랜 세월을 사람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그 계곡 곳곳 마다 전설을 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전설들은 크게 지명전설(地名傳說), 풍수전설(風水傳說), 암석전설(巖石傳說), 지소전설(池沼傳說) 등으로 나뉜다. 지명전설로는 신라 혜공왕과 연관되는 「가좌골 전설」과 조선 영조대의 열녀 해월과 연관되는 「상봉고개 전설」이 있다. 풍수전설로는 조선 선조 대의 이지함(李之函)과 관련되는 「우복동 전설」과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이끌었던 이여송(李如松)과 관련한 「명혈 끊기 전설」이 있다. 암석전설로는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광포전설의 한 유형인 「아기장수전설」과 이에 관련한 「용마전설」이 있고, 지소전설로는 임진왜란 당시 청주인근에서 활약하였던 승병들과 관련한 「장군수(將軍水)」전설이 있다.

진산은 지역 수호신의 정주 공간으로서, 이런 곳을 중심으로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공동체신앙이 고대로부터 전승된다. 우암산(牛岩山)[338m]이 오랜 세월 청주의 진산으로 인식되어 왔으므로 이곳에 공동체신앙과 개인신앙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조선시대의 문묘와 성황당은 관례에 따라 고을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당이산(唐羡山)에 ‘성황당(城隍堂)’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성황당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을 위한 신사가 건립되면서 성황제는 단절되었다. 또한 『청주읍지(淸州邑誌)』에서는 우암산(牛岩山)[338m]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의 존재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암산신을 기원의 대상으로 삼아 가뭄이라는 각박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수동지구에서는 지역민의 염원을 결집시켜 진산의 산신에게 기원하는 마을 공동의 제사인 산신제를 지내왔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청주지역이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대내적으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산신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점차 잊혀지고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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