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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107
한자 鄭致和
영어음역 Jeong Chihwa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정태화(鄭太和)
아우 정만화(鄭萬和)
생년 1609년연표보기
몰년 1677년연표보기
본관 동래(東萊)
성능(聖能)
기주(棋洲)
아버지 정광성(鄭廣成)
어머니 창원황씨
아내 의령남씨(宜寧南氏)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자는 성능(聖能)이며, 호는 기주(棋洲)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로,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정치화는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으로 정치적으로는 서인(西人)이다. 부인은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아들을 얻지 못하여 형 정태화의 막내아들 정재륜(鄭載崙)을 입양하였는데, 이가 효종(孝宗)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는 사돈관계가 되었다.

[활동사항]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 4위로 급제하여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을 거치다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에서 1641년에는 충청도, 함경도, 황해도의 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고,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세자가 서양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때 패초(牌招)에 나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1647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 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가, 1650년(효종 2)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고, 뒤이어 경기도관찰사·도승지·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때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하였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정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고 1677년(숙종 3) 9월 중추부영사로 죽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6.23 [가계] 수정 <변경 전> 정광성(鄭廣城)의 아들로, <변경 후> 정광성(鄭廣成)의 아들로,
2011.04.13 본문 내용 수정 이듬해 송시열(宋詩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이용자 의견
정** 가계 첫째줄의 정광성(鄭廣城)을 정공성(鄭廣成)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그 근거로 문과방목을 붙입니다.
정치화(鄭致和)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 원문이미지보기 ] .[문과] 인조(仁祖) 6년(1628) 무진(戊辰) 별시(別試) 을과(乙科) 4위(5/14)[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815CE58D654B1609X0
자 성능(聖能)
  • 답변
  • 디지털청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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