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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034
한자 勞動運動
영어음역 nodong undong
영어의미역 labor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균

[정의]

임금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조직을 개선하기 위하여 전개하는 일체의 조직적인 활동.

[개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정권과 유신독재를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정권과 국가권력에 대한 예속 상태가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1970년대부터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적극적 개념과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실천적 개념의 민주노동운동이 태동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노동운동, 노조운동의 무풍지대로 불리던 청주지역은 노동운동의 발전이 매우 더딘 지역이었다. 이런 청주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의 씨앗을 뿌린 것은 1972년 정진동 목사에 의해 설립된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이다.

1978년 신흥제분 사건, 청주시청 미화원 임금체불사건 등 1970년대의 굵직한 사건등이 도시산업선교회의 손을 거쳐 갔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88년 청주지역 택시노조파업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도시산업선교회를 거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활동사항]

1970~1980년대 초반에 전개된 노동운동은 1980년 일신광업 사건, 속리산 고속 사건 등이 있었지만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개별화된 채 종료되었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발생되는 정도였던 청주지역에서 1985년을 지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구로공단 못지않게 밀집되고 도심에 인접한 청주공단에 광주민주화운동과 군사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을 거친 학생운동출신이 몰려든 것이다. 그러나 1986년 대화운수 김태웅의 분신을 계기로 성진사, 반도제대 등에서 학생운동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이 당국에 적발되면서 이들의 활동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자주적·조직인 노동조합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 난관에 봉착할 즈음 1987년 7월~9월 노동자 대투쟁시기가 도래한다. 당시 금성사, 금성계전, 대농, 조광피혁, 영태전자 등에서 ‘어용노조 퇴진’, ‘근로조건 향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났고, 청주교통 버스 안내양 사건, 삼영화학, 택시노조에서 임금인상, 노조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발생한다. 이 시기 8월 한달 동안만 청주·청원지역 30개 사업장, 기타 지역 30개 사업장 등 60여개 사업장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는 이전의 20년 동안 발생했던 노동쟁의 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1987년 12월 15일 현 전국교직원노조의 모태가 되는 ‘민주교육추진 충북교사협의회’가 창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9년도에 공식적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된다. 이때 충북도내에서 25명의 교사노동자가 해고되었다.

1988년에는 월급제를 도급제로 바꾼 것에 항의해 청주지역의 11개 사업장 택시노동자들이 연대파업을 진행했고, 100여명의 노동자가 집단해고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91년에는 충북전자에 도내 최초로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노동자들은 공장 옥상에서 격렬한 저항으로 맞섰다.

이렇듯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노동운동 탄압시기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해고됐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1991년 5월 1일에는 정부당국의 탄압을 뚫고 충북대학교에 4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도내 최초로 공개된 ‘노동절’ 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김영삼(金泳三) 문민정부의 등장, 소련사회의 몰락, 전자·섬유업종 중심인 청주공단 기업의 도산과 폐업 등이 맞물리면서 청주공단의 민주노조운동은 서서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996년 3월 23일 19개 노조 5천명의 조합원이 소속된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가 서원대학교에서 공식출범했다. 이로써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싹이 튼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결실을 맺고, 노동운동의 불모지라 불리던 청주와 충북지역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안기부법을 날치기 강행처리한 것에 반발해 민주노동운동진영은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2월 28일까지 4단계 파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시킨다.

1997년 온 나라를 꽁꽁 얼어붙게한 외환위기 발생과 IMF관리체제의 등장은 청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원군 부용면에 위치한 만도기계(지금의 캄코, 지멘스VDO한라)는 수백명의 정리해고, 무급휴직을 단행했고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를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1998년 도입된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은 노동시장을 급격하게 재편한다.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이 급속히 확산되고, 이는 2005년 현재 전체노동자의 60%에 해당하는 8백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을 제공하고도 정규직 노동자의 2/3에 불과한 저임금,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고용의 불안, 각종 비합리적인 차별 등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1999년부터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운동의 화두로 등장했고 현재는 노동운동의 가장 큰 쟁점이자 과제가 되었다.

한편 공무원노동조합은 1999년 3월 직장협의회법 발효로 자치단체별로 직장협의회가 설립된 것이 시초이다. 2000년 5월 발전연구회가 설립되었고 2001년 3월 전국공무원노조연합 출범, 2002년 3월 23일 공무원노조가 출범하면서 충북에서는 2002년 4월 18일 공무원노조 충북본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2002년 5월 전국공무원노동조합결의대회(노조출범 이후 최초 전국결의대회) 개최, 2002년 하반기 공무원조합법 입법추진, 2002년 11월 4~5일 연가투쟁, 2003년 10월 공무원노조 특별법 반대 전국지부릴레이, 2004년 11월 15일 공무원노조 특별법 반대 공무원노조 총파업을 거쳐 현재 희생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중심으로 재조직사업 중에 있다.

[현황]

1999년 7월 현재 충북지역노동조합의 기본현황으로는 노동조합 수는 235개, 조합원수는 34,239명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충북지역의 민주노동운동은 그간의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임금구조 개선, 작업장 안에서의 노동자 인격권 증대, 근로조건 개선등의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향상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정치민주화운동과 결합되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활동을 수행했다.

이제는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서 사회복지, 사회안정망 확대 등 국민적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고 빈부격차 해소 등 경제민주주의 운동의 영역까지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청주와 충북지역의 민주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고 단계적으로 노동운동의 지평을 확장하여 왔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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