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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017
한자 言論
영어음역 eollon
영어의미역 journalism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정규

[정의]

새로운 소식이나 정보를 수용자에게 전달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개념]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새 소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여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표현하거나 공표하는 것을 넓은 의미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게 되자 개인의 힘으로는 복잡한 사회생활에 대처할 수 있는 소식이나 정보를 스스로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매하는 전문적인 기관이 생기게 된다. 신문사, 방송국, 잡지사, 통신사 등의 언론기관이 나타났으며 이를 매스미디어라고도 부른다.

[언론의 종류]

언론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대인매체와 대중매체를 들 수 있다. 대인매체는 벽보나 포스터 또는 펼침막 같은 것과 팜프렛이나 성명서와 같은 매체로 한정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언론매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매체는 고도로 발달된 인쇄술로 신문을 발행하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방송매체의 뉴스프로그램에서 보내는 내용과 같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활동이 있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언론으로 근간을 이루는 것은 신문과 방송이다. 청주시는 도청 소재지로 충청북도 도내의 신문·방송·언론의 중심이다. 신문언론은 충청북도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일간신문이 있다. 『중부매일』, 『동양일보』, 『한빛일보』, 『충북일보』, 『충청투데이』 등이 일간으로 발행되고, 『충청리뷰』『충북뉴스』 등이 주간으로 발행되고 있다.

방송언론으로는 한국방송공사(KBS) 청주총국MBC충북이 있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을 송출하고 있으며, 청주방송[CJB]이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기독교청주방송과 청주불교방송이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이들 방송은 취재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의 뉴스방송과 함께 지역뉴스를 취재하여 매일 수차례 방송하고 있다.

[어원]

언론이란 단어는 원래 말이나 글로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초기부터 찾아 볼 수 있는 용어이다. 조선조에는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이라고 하여 국왕에게 올바른 의견을 알리고 관원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정사를 올곧게 수행하게 하는 직책의 관원이 있었다. 대체로 이러한 직책은 사간원이나 사헌부 관원들이 맡았다. 국왕에게 상소와 소차를 통하여 견해를 진술하였으며 국왕은 이에 대해 답변인 비답을 반드시 주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필사신문인 『기별』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언론이란 단어를 매스미디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고 있다.

[언론활동]

조선시대에는 국왕에게 올리는 상소나 장계 등의 매체로 양반이나 관원들의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수평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통문이란 매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통문은 계나 작은 모임을 알리거나 족보나 책을 인쇄·출간 한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여론을 규합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882년도 1만명의 유생이 연명으로 국왕에게 올리는 「만인소」를 위한 통문은 유명하다.

청주에서는 상소 등의 언론활동 보다 여론을 모으는 통문을 통한 언론활동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이나 단체가 연명으로 보내는 통문은 조선시대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효자·열녀의 표창 등에 대한 여론조성의 통문은 자주 있었다.

개화기에 근대적인 신문매체가 나타나자 신문기자가 언론활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개화기에는 신문 발행부수가 2천~3천부가 고작이었고 종사자도 20~30명 정도였기 때문에 기자의 수는 1개 신문사에 몇 명에 불과했다. 청주에서 성장하여 서울 성균관에 입학하여 후에는 박사에까지 오른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구한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5년 4월에 성균관박사가 되고 그후 장지연(張志淵)의 초빙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로 활약하였고 1907년 11월경 항일언론에 앞장 섰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활약하다 1910년 일제에 병합되기 전에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항하여 『신대한신문』을 발행하는 등 평생을 학문 연구와 독립운동,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면서도 언론활동을 계속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는 신문 지면에 민족주의사관을 담은 논설을 발표하여 근대사학의 아버지로 존경받게 되었고 항일논설은 의병이나 일반 독자들에게 나라의 위기를 전달하여 뜨거운 애국심을 일깨우게 하였다. 「천화당시화」라는 논설의 연재는 근대비평가의 비조가 되는 등 그는 선구적인 언론인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1907년 당시 청주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지사가 있어 적지 않은 독자가 있었다. 명문장으로 쓰여진 단재의 논설에 감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타고난 시인으로 논설 가운데 시가를 삽입하여 쓰기도 하였으며 논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로 논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신문언론]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하던 『조보』(일명 『기별』)가 경주인을 통하여 전달되어 청주에 사는 관리나 양반들이 구독하고서 국왕의 동정이나 인사·임면 소식과 정부가 돌아가는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개화기에 근대적인 신문이 발행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병탄되어 식민지로 전락된 시기에는 청주는 도청 소재지였으나 일본인들도 신문을 발행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지국이 설치되어 청주의 독자들은 이들 신문을 구독하였다. 청주의 소식이 이들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고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일보(京城日報)』나 대전에서 발행되던 일어신문 『중선일보(中鮮日報)』 등도 보급되어 일제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는데 앞장섰다.

해방이 되자 청주에서는 신문발행을 추진하여 김원근(金元根)[1886~1965]의 출자로 1945년 3월 1일 『국민일보』라는 제호로 타블로이드판 주로 1면짜리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창간호는 4면으로 한지에 인쇄 발행되었으나 당시 미군정 아래 열악한 종이 사정으로 2호부터는 신문용지의 품질은 매우 조약하였다.

창간사에서 “불편부당(不偏不黨), 대공중정(大公中正)”의 사시를 내걸고 초대 사장겸 발행인은 김원근이었으며 편집인은 김동환이었다. 1948년 2월에 이도영(李道榮)[1913~1973]이 50만원을 투자, 자본금이 250만원이 되었다. 1953년 11월 28일 ‘오식사건’으로 발행 허가가 취소되자 이를 재건 1954년 3월 15일에 『충청신보(忠淸新報)』로 개제하고 사장에 이도영이 취임하였다. 1960년 8월 15일 제호와 사명을 주식회사 충청일보로 변경하고 1964년에는 충청북도의 신문 역사상 최초로 윤전기를 도입했다. 1973년 이도영 사장의 별세로 직계인 이석훈이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국민일보』에서부터 『충청일보』에 이르기까지 청주에서는 거의 독점적인 위치에서 신문을 발행하였다.

4·19직후 주간신문과 일간지가 잠시 발행되기도 하였으나 언론기본법이 폐지된 1988년까지 『충청일보』의 독주시기였다.

1989년 『중부매일』이 이상훈을 대표이사로 선임하여 조간신문으로 발행되었으며, 1991년 조철호가 사장이 되어 『동양일보』가 창간되자 3개의 일간지가 경쟁하는 체제가 되었다. 그 후 『충청매일』 등 새롭게 발행되었다가 사라진 신문도 있었으며 현재에는 『한빛일보』『충북일보』 『충청투데이』가 창간되어 발행되고 있다. 이들 신문은 지역신문간의 과당경쟁으로 경영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고 발행부수가 미약하여 그 영향력은 점차로 감소해 가는 추세이다.

[방송언론]

방송언론은 라디오 방송에서 출발한다. 청주에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16일에 청주방송국이 준공되어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들의 전쟁 수행의 목적으로 개국되었다. 호출부호 JBQK, 주파수 600KHz. 출력 50w로 인구 3만명의 청주읍이 가청권이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청의 감독하에 들어갔으며 정부 수립 이후에는 공보처에 소속되어 정권의 시녀와 같은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라디오는 연속극과 악극단의 연주 등으로 청취자들의 애호를 받았다. 라디오 방송의 뉴스보도는 친정부적인 내용이 많았다. 1960년대부터 텔레비전 방송이 KBS본사에서 송출되기 시작하고 충청권에 중계소가 생기자 청주에서도 텔레비전 수상기가 보급되었다. 1965년 12월 20일 청주시 사직동청주KBS 청사가 이전되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덕택으로 민간방송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주문화방송의 발족은 처음에는 충청방송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 10월 23일 개국하고 1971년 10월 1일 충청일보의 사장인 이도영이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이후 1980년도 언론통폐합의 여파로 청주 MBC의 경영권은 MBC 본사로 이관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의 연속극이나 프로그램을 가정이나 직장에서 많이 청취하였으나 점차로 텔레비전의 방송이 본격화되자 라디오는 부차적인 방송 매체로 전락하였다. 1973년 한국방송공사라는 이름으로 공영방송을 외치며 나왔으나 유신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앞장섰다. 1987년 6월 항쟁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는 동안 방송의 공익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방송언론도 케이블 텔레비전, 위성방송, 인터넷, 휴대전화, DMB 등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6.10.04 내용 수정 MBC충북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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