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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887
한자 民間信仰
영어음역 Mingan sinang
영어의미역 folk beliefs
이칭/별칭 민속신앙,토속신앙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김영진

[정의]

민간에서 초월적인 자연신에 대한 숭배와 그 실천적 행위.

[개설]

원시시대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을 숭배하면서 자연을 신격화하고 종교적으로 신앙하면서 형성된 자연신앙에서 발달한 원시종교로서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고급종교처럼 교주도 교리도 교단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신앙의 대상은 산·물·바위·나무·동물 같은 자연물을 신으로 섬기며, 신앙의 목적도 단순히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극히 현실적인 소원뿐이고 신앙의 행위도 일정한 규범이 없다. 다만 조선시대 유교정책으로 말미암아 집단신앙에서 유교의례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형태]

민간신앙은 크게 개인적 신앙과 집단적 신앙으로 나뉜다. 개인적 신앙은 가장이나 주부가 집이나 가족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신앙이다. 가신은 집터를 지키는 터주,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 집을 지키는 성주, 조상신인 제석(帝釋), 자손을 점지하고 지키는 삼신, 재물을 지켜주는 업 등이 있다.

매년 시월 상달에 무당이나 경객(經客)을 불러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신제(家神祭)로 안택(安宅)을 하거나 특별히 집안에 탈이 있을 때는 개별적으로 가신에게 굿을 하거나 주부가 고사를 지낸다. 또 집안에 우물이 있거나 자손이 귀한 집에서는 용왕제(龍王祭)를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집단적 신앙은 동민들이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 동신(洞神)을 공동으로 섬기는 신앙인데, 동신은 산신·서낭·탑신·장승 등이 있다. 산신은 산악숭배에서 형성된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신으로 처음에는 산 자체를 신으로 섬겼지만 후대에는 호랑이를 산신령이라 하였으며, 마을 진산(鎭山)에 있는 나무나 바위 또는 당집에 산신도(山神圖)나 위패(位牌)를 신체(神體)로 모신다.

서낭은 흔히 ‘성황(城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황은 중국의 육조(六朝) 때 형성된 수용(水庸) 즉 성지(城池)를 지키는 신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라와 고을에서 관행제(官行祭)를 지냈다. 그러나 서낭은 몽고의 경계신인 ‘오보(鄂博)’ 계통으로 우리나라에는 주로 고구려가 자리했던 한강 이북에 분포된 북방민속으로 서낭과 성황은 발음이 비슷해도 그 성격과 기능은 분명히 다른 신이다.

즉 서낭은 마을 입구나 고개에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은 서낭당이나 당집에 위패를 신체로 모신다. 드물게 나무를 ‘서낭나무’라 하여 신체로 모시기도 하며 간혹 흙이나 무쇠로 만든 말을 서낭당에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북방 기마민족(騎馬民族)의 민속으로 특별히 ‘말서낭’으로 부른다. 또 서낭당 옆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쓴 숫장승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쓴 암장승을 마주보게 세우는 경우도 있다.

탑신은 옛날 ‘소도(蘇塗)’의 유풍으로 주로 옛날 마한(馬韓)이 자리했던 금강유역에 분포된 남방민속인데, 마을 입구에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은 돌탑을 신체로 모시며 그 모양은 서낭과 비슷하나 나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탑신 옆에 긴 장대 끝에 새 모양을 깎아 세운 솟대를 세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마을에서 산신·서낭·탑신을 하나만 모시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산신과 서낭 또는 산신과 탑신을 함께 모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동민들이 매년마다 일 년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위하여 옛날에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으나 후대에 마을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즉 그 해의 생기와 맞는 나이를 가진 남자를 제주로 뽑아 동신제를 지낸다.

동신제를 지낼 때는 보통 ‘삼일정성’이라 하여 삼일 전에 미리 신을 모신 신당(神堂)이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을 청소한 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 부정을 막으며 제주와 동민이 모두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근신하는데, 특히 주는 목욕재계하고 담배와 술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산신제는 대개 정월 14일 밤에 제주가 마을을 대표하여 축관과 유사를 데리고 산신당으로 올라가 제사하며, 서낭제와 탑신제는 정월 보름 아침에 제주와 동민이 함께 서낭당이나 탑신당에서 제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장승이 있을 경우 장승제를 따로 지내거나 서낭제 다음에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제주가 술을 올리고 절만 한다.

그런데 동신제를 지낼 때 짐승이나 사람의 주검을 보았거나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며 또 마을에 초상이 났거나 화재가 있었거나 아이를 낳은 사람이 있으면 연기하거나 중지한다.

제의는 동민들이 정성껏 내놓은 쌀과 돈으로 마련한 돼지머리·시루떡·삼색과일·포 등을 제물로 차려놓고 제주가 헌관이 되어 유교식으로 참신(參神), 헌작(獻酌), 독축(讀祝), 사신(辭神)하고 신의 감응을 알아보기 위하여 소지(燒紙)를 올리는데, 소지에는 마을을 전체를 위한 대동소지와 각 가구를 위한 호별소지가 있다.

한편 산신을 ‘국사(國師)’라 하는 마을에서는 국사를 고려시대 왕을 보필하던 고승인 국사로 이해하여 술이나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제사를 마치면 동민들이 한 곳에 모여 음복하고 뒤풀이로 농악을 치며 놀거나 집집마다 돌아가며 집터를 눌러주는 지신밟기와 우물마다 샘고사를 지내며 하루를 즐긴다.

또 가뭄이 들거나 유행병이 돌면 동신에게 기우제(祈雨祭)나 방역제(防疫祭)를 지내기도 한다. 집단신앙은 비록 원시적 다신종교이지만, 동민들은 동신제를 통하여 마을공동체 의식과 일체감을 가지고 화목과 단결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청주의 민간신앙]

옛날 청주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가신을 모시고 시월 상달이면 안택을 하거나 고사를 지냈으며 마을마다 거의 동신제를 지냈다. 청주의 가신제는 터주, 조왕, 성주, 삼신, 제석, 용왕, 업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동신제는 산신제, 서낭제, 탑신제, 장승제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서낭제가 제일 많았다.

산신제는 낙가산, 부모산, 우암산(牛岩山)[338m]의 산신당과 흥덕구 수의동, 흥덕구 상신동, 상당구 율량동의 산신당에서 지냈고, 서낭제는 상당구 내덕동, 대성동, 명암동, 외남동, 용담동, 율량동, 주성동, 흥덕구 동막동, 미평동, 산남동, 상신동, 석곡동, 수곡동, 장암동 등에서 지냈으며, 탑신제는 흥덕구 성화동에서 지냈다. 이밖에 상당구 내덕동, 주성동, 흥덕구 죽림동 등에서 장승제를 지냈는데 그것은 오늘날 토속지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미신’이란 이름으로 탄압하면서 많이 없어졌으며 광복 후에는 일부 종교단체에서 미신으로 매도하고 특히 새마을운동으로 많은 신당이 허물어지고 장승이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주민의식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의하여 민간신앙이 크게 소멸하는데 그 결과 가신제는 찾아보기 어렵고 동신제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현황]

오늘날 청주의 산신제는 상당구 율량동의 경우 골말의 산신제는 서기사(瑞氣寺)에서, 상리의 산신제는 보암사에서 대신 지내고 있으며, 상당구 용정동 이정골에서 동제로 낙가산의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서낭제는 상당구 정상동 돌꼬지의 동제로 전승되며, 탑신제는 흥덕구 성화동 원농촌의 동제로 유지되고 있는데, 그 제의의 내용이 점차 약화되고 형식이 크게 간소화되고 있다.

그래도 이 세 곳에 동신제가 전승되고 유지되는 요인은 무엇보다 동민들이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의 결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용정동이정골정상동돌꼬지는 비록 청주시라고는 해도 크게 개발되지 않은 곳이고, 성화동의 원농촌은 개발이 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토착민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도 개발되고 아파트가 세워져 외지인의 입주가 크게 늘어난다면 머지않아 소멸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용담동 당고개의 서낭당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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