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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228
한자 朴春茂
영어음역 Park Chunm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순천
화천당(花遷堂)
아우 박춘번(朴春蕃)
시호 민양(愍襄)
추증/추서 참찬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임란의병 박춘번(朴春蕃)의 형이다.

[활동사항]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1544~1592]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

그 해 7월 4일 청주 복태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종사관 이시발(李時發)·한혁 등과 함께 청주 탈환을 맹세하였다. 공을 탐한 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도와주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격문을 띄워 모병에 성공하였고, 옥천에서 기병한 조헌도 청주로 향하였다.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게 방어사 이옥(李沃)과 조전장 윤경기(尹慶祺)가 패하였고, 의사(義士) 박우현(朴友賢) 또한 전사하여 청주 일대는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8월 1일 의병장 박춘무(朴春茂)[1544~1611]와 조헌, 영규대사(靈圭大師)[?~1592]가 합세하여 박춘무는 남문, 조헌은 서문으로 진격하여 소낙비가 내리는 가운데서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청주성을 탈환한 후 조헌영규대사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갔고, 박춘무는 진천으로 향하여 적을 10여 일간 포위하고 있었다. 원병이 오지 않아 포위망을 풀으려 했으나, 부녀자들이 포위망을 풀지 말 것을 종용하면서 음식을 갖고 와 먹이는 등 도와 주었다.

의병군은 적진의 허술한 남쪽을 습격하여 달아나는 적을 크게 무찔러 진천 지역 민심을 크게 안정시켰다. 이 싸움에서는 그의 아들과 아우가 선봉으로 나서 큰 공을 세웠다. 평소 자식들에게 “전진(戰陣)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다.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다.

[경력]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林川郡守)·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였고, 이듬해는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낸 바 있다. 관계(官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참찬(參贊)에 추증되고,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 내에 박춘무 전장기적비가 남아 있다.

[학문과 사상]

조헌과 함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 동문수학하였다.

[저술]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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