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현대 화가. 강신석(姜信碩)[1916~1994]은 1916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하르빈대에서 공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이후 미술 활동을 하다가 1952년에는 해군 종군 작가로 참전하였다. 1960년대에는 주로 마산 외교 구락부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강신석은 파스텔 화가였는데 파스텔이 갖고 있는 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사진 예술가. 강신율(姜信律)[1913~2009]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 미원 상공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고 오사카 음대에서 현악과를 2년간 수료하기도 하였다. 다시 오사카 사진학교를 수료한 후 귀국하여 마산의 조광 사진관을 인수 받아서 운영하였다. 1955년에 마산 사진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1956년에 첫 개인전을 개...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연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인물. 강유출(姜裕出)[1902~1967]은 진해의 연도[현 창원시 진해구 연도동] 주민의 한 사람으로 평생토록 연도 사람들에게 온후한 덕과 인자한 행실로 많은 감화를 행하였다. 강유출의 사후 10여년이 지난 뒤인 1977년에 강유출의 공덕을 잊지 못하고 송덕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강유출은 살아있는 동...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 강종완(姜宗完)[1900~1962]은 마산 동성동에서 출생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셌다고 한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을 비롯하여 인근의 함안, 진주 등지를 다니며 18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배일 결사대를 조직하여 구국의 길에 나섰다.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묘주(高昴柱)[1893~1919]의 본관은 제주이며, 창원시 진전면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鎭東面), 진북면(鎭北面) 3개 면의 연합 독립 만세 운동인 삼진의거(三鎭義擧) 당시, 계획에 따라 집합 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천변에 모여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8,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 만세를...
-
창원시 마산 출신 여배우. 아버지는 통영 군수를 지냈다. 1952년 초대 마산시 의회 부의장을 지낸 고재열이 오빠다. 고선애(高善愛)[1911~?]는 마산 출신으로 대구에서 대구 공립 고등여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 함경남도 북청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하였다. 이후 결혼하여 희곡과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나운규의 ‘연쇄극’에 참여하면서 배우생활...
-
조선시대 창원 지역의 열녀. 공우직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감계리 사람이다. 공우직이 병사하자 공우직 처 이씨가 슬픔을 가누지 못해 남편이 죽은 날 목을 매 죽어서 남편과 한 무덤에 묻혔다. 이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구수서(具守書)[1894~1950]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봉암 마을의 구장으로 마을과 인근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다. 당시 거사를 계획하던 변상헌 등을 찾아가서 논의를 한 뒤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마을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였다. 그 결과 마을 주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
-
조선 후기 창원 지역의 열녀. 구학령 처 강씨는 1783년(영조 14) 참봉 진양강씨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지금의 창원시 동읍 단계리에 살던 구학령에게 시집왔다. 수개월 만에 남편 구학령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강씨는 약을 구해 간호하고 매일 밤 천지신명께 남편의 회복을 빌었으나 남편은 죽고 말았다. 이에 구학령 처 진양강씨는 미망 죄인으로 하...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권영조(權寧祚)[1883~1955]는 진동면 고현리에서 태어나 1910년 향리에서 사립 경행학교를 설립하였다. 인근의 청년들을 모아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진전면 일암리 변상태의 집에서 권영태, 권태용 등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하였다....
-
일제강점기 창원시 진전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오규(權五奎)[1895~?]는 1919년 3월 28일 진전면 고현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권영조, 백승학 등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의 선봉에 서서 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격문을 뿌리고 구호문을 외치며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부산...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교육자. 권오봉(權五鳳)[1879~1959]은 흥화 학교를 졸업하였다. 백산 상회에 자금을 투자하여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도 힘썼다. 1910년에 마산 진전면 오서리에 있는 경행재(敬行齋)에 사립 경행 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에 공을 들였다. 당시 경행재는 신교육의 전당이자 민족 교육 운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27년에 일제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출신의 시인이자 평론가. 권환(權煥)[1903~1954]은 1921년 중동 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신소년』에 「아버지」를 발표하였다. 일본 야마가다[山形] 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교토[京都] 제국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사상운동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생 기관지인 『학조...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김성배이다. 성주 이씨 이시록과 혼인하였다. 남편 이시록이 우연히 병을 얻어서 수년간 병석에서 지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지성껏 간병하였다. 남편의 아픔을 대신하고자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토록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병세는 악화되어 갔고 애통하게도 숨지고 말았다. 남편의 시신을 거두고 난후 여필종부로서 남...
-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호는 초정(草汀·艸汀·草丁)이다. 시인 김상화가 형이다. 김상옥(金相沃)[1920~2004]은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1939년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시조 「봉선화」를 『문장』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하였다....
-
조선시대 창원 지역의 열녀. 김상찬 처 이씨의 아버지는 이인선(李寅善)이다. 남편 김상찬이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어 수년간을 신음하였다. 이씨는 백약으로 치료하였으나 김상찬이 죽자 모든 예를 다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이 후 어린 아이들을 잘 키워서 집안을 일으켜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호는 현촌이다. 김세익(金世翊)[1924~1995]은 1943년에 함남 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46년에는 서울 대학교 치의학과를 수학하였으며 1948년에 연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49년 마산 여자 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마산과 인연을 맺었다. 1951년에 시집 『석류』를 발간하고 1953년 『문예』를 통해 추천 완...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화인(花人). 아버지 김종두(金宗斗)와 어머니 황예분(黃禮分)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수돈(金洙敦)[1917~1966]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이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에 나고야[名古屋] 중학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산 창신 학교(馬山昌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
-
조선시대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김수양 처 이씨는 창원도호부 서쪽 사율리(斜栗里)[현 경상남도 창원시 명곡동] 출신이다. 이씨는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받들고 남편인 김수양을 예를 다해 섬겼으나, 김수양이 세상을 뜨자 남편을 따라 죽었다. 김수양 처 이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순(金純)[1900~?]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창신 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때 사촌 매형인 배동석(裵東奭)이 서울 만세 의거에 참가 한 후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서울에서 가져 온 『독립신문』을 전하였다. 『독립신문』을 읽은 후 학우들과 밤을 세워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등사하였다. 이들은...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환(金永煥)[1896~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가 대한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어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부·열녀.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김정우이다. 성주 이씨 이태순에게 출가하였다. 김용연(金龍淵)[1891~1961]은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자애롭고 현명하고 정숙하였다. 가난한 살림에도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주변의 많은 이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1913년 남편이 빈곤한 생활을 타파하기 위하여 광산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집을 떠난...
-
마산 출신의 시인. 본관은 김해. 호는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아명은 만석(萬石). 아버지 김치완(金致琓)이고 어머니는 박경포(朴敬布)이다. 김용호(金容浩)[1912~1973]는 1928년에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금성 철공소, 원동 상회 등에서 일하다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938년부터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 독립운동가. 김용환(金容煥)[1884~1933]은 1919년 3월 2일에 이갑성, 임학찬, 이형재(李瀅宰) 등으로부터 3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3월 3일 만세 운동이 있던 날 무학산으로 올라가서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곧 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
-
마산 출신의 아동 문학가. 김원룡(金元龍)[1911~1982]은 1929년에 마산 공립 보통학교[현 마산 성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경남 도련 집행 위원의 서기를 지냈다. 1946년 2월에는 아동 잡지 『새동무』를 창간하였고, 1947년 9월 동요 동시집 『내 고향』을 발간하였다. 1947년 조선 식산 은행에 근무하면서 1948년 조선 식산 은행의...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자. 김일규(金一奎)[1922~1981]는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1948년 『자유 민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경남 신문의 경남 매일의 보도 기록 사진작가를 지냈다. 특히 3·15 의거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만천하에 알렸다. 그 밖에 근현대 마산의 정치, 경제·사회,...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효부. 김처화 처 밀양박씨는 경상남도 창원 지역 사람이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시대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인물로 추정한다. 김처화 처 밀양박씨의 시아버지 김한장(金漢章)은 머리에 종기가 나서 항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이에 김처화 처 밀양박씨...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했던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2004]는 1935년 통영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2년 일본 대학 예술 학원 창작과 재학 중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퇴학당하였다. 이후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기도 하였다. 1945년 통영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 문화 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 중학과...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언론인. 김태룡(金泰龍)[1932~1993]은 고려 대학교 경제과를 수료하고 1960년부터 마산 일보 논설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대구 매일 신문 편집 국장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는 부산 일보 편집국장 서리를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부산 일보 이사 겸 논설 주간을 역임하였고 1982년에는 부산 일보 전무 이사를 역임...
-
창원 출신의 시인. 김태홍(金泰洪)[1925~1985]은 1945년 해인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46년 마산 여자 고등학교, 마산 상업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후에는 부산으로 옮겨갔다. 동인활동도 활발히 하였는데 1950년대 초반에는 손동인(孫東仁), 안장현(安章鉉)과 함께 동인회 ‘시문(詩門)’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의 7일...
-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김해랑(金海郞)[1915~1969]의 본명은 김재우(金在宇)이다. 6·25 전쟁 직후에 한국무용 예술인 협회[현 한국 무용 협회 전신]를 창설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마산에 무용소를 개설하여 한국 무용계의 대들보 노릇을 하며 평생을 후진 양성에 이바지 했다. 어릴 때부터 춤추기를 좋아하여 부산 동래 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
-
마산 출신의 사진 예술가. 남기섭(南基燮)[1922~2007]은 10살이 되던 때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오사카 음악 학교에서 3년 정도 공부하였고 틈틈이 이웃 사진관 주인인 ‘나카후지’의 조수 겸 제자가 되어 어깨너머로 사진 관련 기술을 익혔다. 해방 직후 한국으로 들어와 마산 오동동에 ‘사진 문화사’를 열었다. 남기섭은 이를 계기로 1948년 부산 일보 사...
-
창원시에서 활동한 화가. 할아버지는 을미의병 때 항일 투쟁한 류봉영이고 아버지 류소우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류시원(柳時原)[1928~2010]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41년 안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새이 중학교 4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하여 안동 농림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쟁 이...
-
조선 후기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박경천 처 분성 배씨는 곧고 맑은 품성으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경천이 해괴한 병에 걸려 앓게 되자 박경천 처 분성 배씨는 자신이 그 병을 앓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남편은 효력도 없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배씨는 그날 밤 남편 박경천의 시신을 안고 따라 죽었다. 박경천 처 분...
-
조선시대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박문중 처 김씨는 창원 지역 사람이다.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어 효부로 칭송이 자자했는데, 남편 박문중이 병에 걸려 죽자 3일 만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박문중 처 김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박익천 처 배씨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안민동 출신이다.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어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했는데, 남편 박익천이 죽자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박익천 처 배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박재호(朴載護)[1927~1985]는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1945년 경상북도 김천의 김천 중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1955년 『문학예술』지에 「작은 고동」이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사상계』에 신인으로 작품이 당선되었다. 이때는 주...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두동 출신으로 마을에 헌신한 인물. 배종경(裵鍾景)[1933~1994]의 원래 호적에 등재된 이름은 배종선(裵鍾先)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인 두동에 진입로가 좁고 협소하여 길을 넓히고 포장하여 마을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배종경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 기념비가 1979년에 세워진 것...
-
조선 말기 창원 지역의 효부이자 열녀. 손씨 처 이씨의 이야기는 김종하의 『창원군지』에 처음 등장한다. 따라서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899년(고종 36) 『창원읍지』 편찬 이후의 일이라 여겨진다. 손씨 처 이씨는 열일곱 살에 웅남면 정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웅남동] 손씨 집에 시집을 갔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었다. 이에 손씨 처 이씨는 정절을 지키고 시부모를 잘 봉...
-
창원시 마산의 문화 예술 발전에 헌신한 인물. 안윤봉(安允奉)[1926~1983]은 마산 공립 상업학교[현 용마 고등학교]를 거쳐 경성 고등 상업학교를 다녔다. 이후 조선 식산 은행 마산 지점, 동양 주정 공업 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서울 신문사의 총무국장, 삼창 산업 진흥 주식회사를 거쳐 경남 매일 신문[현(現) 경남 신문]에서 근무하였다. 1950년대 마...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리에서 마을을 위하여 헌신한 인물. 안응규(安應奎)[1899~1938]는 출신과 생장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전무하나 마을에서 10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 구장을 하면서 선행을 베푼 것으로 보아 제덕리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일 것이다. 안응규는 4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안응규가 세상을 떠난...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서 웅천면장을 지낸 인물 양제환(梁濟煥)[1878~1945]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9월 20일에 창원군 웅천면장을 지냈다. 1921년 2월 21일에는 웅천 어업 조합장에 취임하였고, 1926년과 1932년에도 웅천 어업 조합장에 재선임 되었다. 1921년에 양제환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건립되었는데, 내용을 보면 진해 웅...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켜 포상된 여자. 대부분의 열녀들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남편이 죽으면 수절하거나 남편을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열녀들의 행적은 멀리는 순장 제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식하지 않고 남성의 예속물이나 종속물로 인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유교적 국가 이...
-
창원 출신의 음악가. 윤병구[1941~1985]는 마산 중학교, 마산 상업 고등학교[현 용마 고등학교] 거쳐 1962년에 경희 대학교 음악 대학 기악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마산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창신 중학교 교사를 역임하면서 마산 실내악단 즉 지금의 마산 시립 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1977년까지 3회에 걸쳐 지휘자를...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윤재홍 처 강씨의 열행 사실은 1899년(고종 36)에 편찬된 『창원읍지(昌原邑誌)』에는 전하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창원읍지』 편찬 후인 조선 말기로 짐작된다. 윤재홍 처 강씨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동에서 출생하였다. 극진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시어 근동에서는 효부로 칭찬이 자자했다...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살면서 덕을 베푼 인물. 이경팔(李庚八)은 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활동한 인물로 송덕비의 관아 보수와 사당건립 등에 관해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800년대 안골포 일대에서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인물로 파악된다. 비석에 “그 출연하신 재물이 50이요, 은혜를 베푼 재산이 삼백석이로다. 관아를 고쳐 수리하고 당집을...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극작가·연출가. 본명은 흥근(興根). 호는 온재(溫齋)이다. 이광래(李光來)[1908~1968]는 1930년대 극예술 연구회를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연극계에 몸담았다. 1928년에 배재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도쿄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 일보와 중앙 일보 기자...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서양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정규(正揆). 한의사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림(李林)[1917~1983]은 마산의 호신 농업학교[창신 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에 서울의 조선 미술원에서 서양화가 박광진(朴廣鎭)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동경(東京)으로 가서 데이고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명상(李明祥)[1909~1969]은 웅천 공립 보통학교(熊川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고 1929년 3월에 진주 사범학교(晋州師範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창원 진동 공립 보통학교(鎭東公立普通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명상은 1933년 1월 뜻을 같이 하는 동료 교원들과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을 논의하여 그들의 찬동을 얻어서 교...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의 지서장으로 헌신적으로 마을 일을 돌보아 준 인물. 이봉하(李鳳夏)[1926~?]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당시 진해 웅동의 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웅동 경노당을 건립하고, 소사마을의 다리를 가설하는 한편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 사업을 하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이봉하는 이후에 진해경찰서로 이직하여 수사 과장...
-
경상남도 창원 마산 출신의 화가 이상갑(李相甲)[1920~1996]은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4월 일본 동경 제국 미술학교 양화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38년에 조선 미술전에 입선하였고 1941년 일본 도쿄 독립전에 입선하였다. 6·25 전쟁을 피해 제주도를 거쳐 거창 마리면에서 거창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거창읍에서 1954년에...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이석(李石)[1927~1999]은 1945년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14년간 마산 고등학교에 근무했다. 약 20년간을 마산에서 거주하면서 1955년 『현대 문학』에 청마 유치환[1, 2회] 박두진[3회]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처녀 시집 『하초(夏草)』를 발표하면서 『남대문』, 『향관의 달』...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시인. 이선관(李善寬)[1942~2005]은 1942년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 성호 초등학교, 마산 창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산 3·15 의거에 직접 참여하였다. 1963년에 경남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어릴 때부터 뇌성 마비를 앓아서 아픈 몸이었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정의로운 삶을 노래했던 마산의 시인이다. 시집...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강(李壽康)[1912~1262]은 1936년 3월 중순 경에 당시 가덕도 출신 재일 교포 단체인 재대판(在大阪) 가덕인 친목회(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였다. 여기서 1938년 6월경까지 동지들과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한 구체적 실행 방법을 연구 하고 논의 하였다. 그리고 가덕인 친목회(加德人親睦會)의 확대 강화를 방안을 모색하였다....
-
창원시 마산 출신의 배우. 이수련(李秀鍊)[1935~2007]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배우였다. 1935년 마산에서 출생하였다. 동국 대학교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1959년에 「가난한 애인들」로 데뷔하였다. 한형모 감독의 이 작품은 최은희가 주연이었다. 이 작품으로 제3회 부일 신인상(釜日新人賞)과 제4회 국제 영화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1960년대...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룡(李守龍)[1911~?]은 가덕도에서 사립 소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 언동과 차별 대우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속에서 민족 의식을 쌓아가던 중 김근도(金根道)가 중심이 된 재대판 가덕인 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
창원시 마산 출신의 화가. 이수홍(李水洪)[1920~1969]의 본명은 준섭이다. 1939년 일본 동경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양화를 공부하였다. 8·15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이수홍은 의신 여중, 칠원 중, 성지 여고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50~1960년대는 미술평론을 통해 지방 화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승종(李承綜)[1907~1969]은 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 과학 강좌와 강연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따라서 그의 독립 운동의 목적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신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로 창원군 웅...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아동 문학가. 호는 동원. 아버지 이문술과 어머니 진순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6월, 「오빠 생각」의 작가인 최순애와 결혼하였다. 이원수(李元壽)[1911~1981]는 1916년에 창원의 서당에서 수학하였고 1922년에 마산 공립 보통학교에 2학년에 입학하였다.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이 소파 방정환이 만든 잡지인 『...
-
창원 출신 시인·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강상 유인(江上遊人), 노산 학인(鷺山學人).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이다.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1918년 아버지 이승규가 세운 마산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1923년 이후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1925...
-
창원시 마산 출신 동요 작가. 이일래(李一來)[1903~1979]는 1920년에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는데 우연히 천도교 낙성식에 참석하여 김영환 선생을 만나면서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다. 연희 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 보통학교, 창녕군 이방면 이방 보통학교[현 이방 초등학교]에서...
-
창원 출신의 언론인·화가. 이진순(李珍淳)[1917~?]은 청년 시절 일본 명치 전문 대학을 수료하고 동경 입정대학 국어 국문학과를 수료하였다. 일본의 여자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자유 민보사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마산에서 서울 신문, 국제 신문 지국장을 지냈다. 암울했던 1950~1960년대와...
-
창원시 마산 출신의 무용가. 이필이는 마산 출신의 무용가로서 주로 마산에서 활동해왔다. 활동 기간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수차례의 공연을 통해 전통 무용 보존과 보급에 힘써 온 인물이다. 아버지 이찬종과 어머니 구막이 사이에 3남 4녀 중 셋째다. 이필이(李畢伊)[1935~2009]는 명랑 쾌활한 성품과 예술적 재능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태어났다. 어...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언론인·시인. 호는 일묵(一默)·한가람. 필명은 임삼(林三)이다. 임영창(林泳暢)[1917~2001]은 건국 대학교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마산 일보 주필, 마산 문인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문인 협회 성남시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현대 시조 시인 협회장 및 한국 문교 문인 협회장을 역임하였고 해군 사관학교, 효성 여자 대학교, 한국 항공...
-
조선시대 창원 출신의 열녀. 장귀 처 양씨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사화동에서 태어났다. 남편 장귀가 죽어서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장귀 처 양씨가 목을 매어 죽어 남편과 한 무덤에 묻혔다. 장귀 처 양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근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가·애국 계몽가.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아버지는 장용상(張龍相)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894년(고종 31)에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에 일본의 명성 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한 시인. 정규화(鄭圭和)[1949~2007]는 청소년기 마산으로 이주하여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신작 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에 「풀잎 1」, 「고향에서」, 「술 노래」, 「한국 돈」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남 민족 문학 작가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
창원 출신의 전각 장인. 정기호(鄭基浩)[1899~1989]는 창원에서 부유한 면장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각가로는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1912년 마산 창신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6세 때 황소산(黃蘇山)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조선 옥새 전각장 계보(朝鮮玉璽篆刻匠系譜)에 의하면 황소산은 옥새전각의 계보를 이어 온 인물이다. 옥새...
-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정민(鄭珉)[1928~2006]은 본명이 정순모(鄭淳模)이고, 어릴 때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주로 한국에서 한국의 전통 무용을 익히고 공연한 한편, 서양 무용인 발레까지도 섭렵하여 무용의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공연하였다. 일찍이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3년 5세에 가수로 데뷔하여 1936년에 일본, 조선, 중국...
-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의 독립운동가. 정운조(鄭云朝)[1888~1951]는 1919년 4월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 지역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웅동면 계광 학교의 교사인 주기용(朱基容) 등이 웅동면 사무소에서 주도한 4월 3일 만세 운동에 참여 하였는데, 이 시위는 당시 인근에서 가장 큰 시위였다. 시위가 있던 날 11...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 평론가·시인. 정재관(鄭在寬)[1931~1986]은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현대 문학』에 시로 등단하였다. 1975년 『동아 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되었고 1975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 평론 입선되었다. 1968년에는 ‘자유 교양 대회’ 논문분야 1위를 수상하였다. 한국 문인 협회,...
-
조선시대 창원 지역의 효부이자 열녀. 정주안 처 안씨의 효행과 열행의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1997년 편찬된 『창원시사』에 전해 온다. 정주안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웅남동 출신의 사람이다. 안씨는 정주안과 결혼 후 시아버지가 눈이 멀고 남편도 병이 들었지만, 수십 년을 한결같이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기어 효부와 열녀로 이름...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연극인·시인. 본관은 동래. 호는 월초(月礁)이다. 정진업(鄭鎭業)[1916~1983]은 마산 공립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 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6년부터 연극인 이광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극단 극연·낭만파·태양에서 연극 수업을 받았다. 1939년 단편집 「카츄사에게로」가 『문장』지에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40...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작곡가·피아노 연주가. 조두남(趙斗南)[1912~1984]은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미국 출신의 신부 조지프 캐논스로부터 서양 음악과 작곡을 배웠다. 11세 때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하였고, 17세 때 첫 가곡집을 발간했으며, 21세 때 가곡 「선구자」를 작곡하였다.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의...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조봉제(鳳濟)의 형이다. 조향(趙鄕)[1917~1984]은 진주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대구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에 일본 대학 상경과를 다니다 중퇴하였다. 해방 후 마산 상업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이 때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했다. 이후 부산에 있는 동아 대...
-
창원 출신의 교육자·정치가. 주기용(朱基瑢)[1897~1966]은 1916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 중학교(五山中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웅동면에 있던 계광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학교에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여러 사람과 뜻을 모아 웅천, 웅동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옥살이를 하였다. 이후 옥살이를 마치자 설립자이자 장인이신 남강 이승훈의...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전해오는 설화 중에 지명에서 생성된 이야기. 지명 설화는 지명과 더불어서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지명 전설은 지명 유래담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지명을 지칭하는 우리말을 활용해서 생성된 것이다. 창원 지역의 지명 전설도 창원의 각 지역의 지명을 뜻하는 우리말에서 생성된 것이다. 지명 전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소설가. 본명은 이숙희, 필명은 이현욱(李現郁)이다. 지하련(池河蓮)[1912~?]은 1930년에 동경 소화 고등 여학교를 졸업하였고, 1935년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임화(林和)와 결혼하였다. 1940년에 결핵 요양차 마산으로 왔다. 1940년 12월에 단편소설 「결별(訣別)」이 평론가 백철(白鐵)에 의해 『문장』에 추천되어...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효부. 진정원 처 정씨의 효행은 1899년(고종 36)에 편찬된 『창원읍지(昌原邑誌)』에는 전하지 않는데, 이루 미루어 『창원읍지(昌原邑誌)』 편찬 후의 일로 짐작된다. 진정원 처 정씨는 창원부 동쪽 봉곡[현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출신이다.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에 눕게 되자 등에 종기가 났는...
-
조선시대 창원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진흥은 처 강씨는 창원도호부 봉곡[현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사람이다. 강씨는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근동에서 효부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남편 진흥은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백방으로 수소문해 약을 구해 먹이고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남편을 살려 달라고 정성을 다해 하늘에다 빌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시인. 본관은 영양(潁陽). 호는 심온(深溫)이다. 천상병(千祥炳)[1930~1993]은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姬路市] 출신으로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마산에서 성장하였다. 1955년 마산 중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상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1964년 부산 시장 공보 비서로 근무하였고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세권(崔世權)[1901~1939]은 1919년 4월 11일 창원군 천가면 가덕도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1919년 3월 말 경 서울에 다녀 온 양흥석(梁興錫)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김동원(金東洹), 이상운(李相云), 조용진(趙鏞晉) 등과 뜻을 모아 천가면에서 4월 11일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화가. 최운(崔雲)[1921~1989]의 본명은 최용운(崔龍雲)이다. 주로 ‘게’를 소재로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중국 북경 중산 미술 학교에서 3년 동안 수학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59년에 흑마회전에 출품하고, 1962년에 재마 미술회전에 출품하는 등 11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창원 남면 중학교[현 창원 남고등학교...
-
창원시 진해구 웅동과 용원 등지에서 마을 주민을 위해 일한 유지. 최태원(崔太元)[1902~1975]은 웅동 면의원, 어업 조합장 등을 지냈다.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는 최태원의 생전에 마을 사람들이 세운 덕행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마을을 위하여 용재교 가설, 교문 개축, 동도로 하수구 시설, 보안등 시설 등을 하였다 한다. 최태원은 일생 동...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해도(崔海都)[1910~1954]는 1930년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에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끼고 스스로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최해도는 평소에도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치 20주년을 맞아 주민들에게 1930년 8~9월경에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고,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결심하...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활동사항] 최현(崔賢)[1929~2002]의 본명은 최윤찬(崔潤燦)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소년 가수로 가극단에서 일하다가, 초청 강사로 온 무용가 김해랑의 눈에 띄었다. 1946년 5월 마산의 김해랑 무용 연구소에 입소하여 전통 춤을 섭렵했고, 피난 와 있던 박용호로부터 현대 무용을 배웠다.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